한번은 누군가의 소개로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다. 수년 전 간경화증으로 진단 받은 남자는 복수와 하지 부종이 있었다. 검은 피부는 윤기가 없고 몸매는 많이 말라 있었다. 복수와 하지부종은 이뇨제로 그럭저럭 줄어들었고 그 뒤로도 가끔씩 부종으로 진료실을 찾았다. 그러다가 한동안 그의 발길이 끊겼다.

경화가 심해져서 큰 병원에 입원했거나 돌아가셨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까맣게 그 환자를 잊고 있었다. 환자에게는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 정도의 건장한 아들과 남편의 병으로 마음이 타 들어가는 고운 아내가 있었다. 그의 아내의 표정에 감도는 안타까운 마음은 보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몇 달 후 한 청년이 찾아왔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 보험카드를 보니 지난번 간경화증 환자의 아들인 듯했다. 진료실을 찾은 이유를 묻자 간검사를 하기 위해 왔다고 그런다. 얼굴빛도 건장한 청년이 간검사를 해달라 하기에 공연한 불안 때문에 제 몸단속을 하려는 구나 하고 조금 얄밉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쯤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고 있을 터인데 자기 몸단속에 급급한 듯한 청년의 웃는 얼굴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간이식을 했는데 경과를 보려고 그런다는 것이다. 일단 진찰부터 하자고 침대에 눕혔다. 옷을 걷어올리는 순간 청년의 배에는 커다란 수술자국이 열십자로 그려져 있었다. 청년은 말했다. 제가 이식을 받은 게 아니고 이식할 간을 드렸어요. 누구에게? 아버지께요. 나는 그제야 일의 앞뒤를 알아챘다. 순간 나는 온몸을 싸아~하니 훓고 지나가는 어떤 전율을 느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청년의 얼굴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듯 내 몸은 떨렸다. 내 얼굴이 북받치는 감정으로 일그러졌고 청년은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려고 청년의 어깨를 툭 치며 아무렇지 않은 듯 건넸다.
"자네 정말 멋쟁이야."

청년이 가고 난 후 한동안 내 마음은 들떠 있었다. 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에게 다시 그런 마음으로 생명을 내어드리는 아들의 용기와 그런 아들과 남편의 중간에 서서 불안과 갈등에 떨었을 부인의 가슴앓이를 나는 상상했다. 아들과 남편이 나란히 수술실 문을 들어설 때 부인은 얼마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열렬히 기도를 올렸을까. 그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식을 받은 아버지는 그 후 한두 달이 더 지나 내 진료실을 찾았다. 아직은 약간 허약해보였지만 지난번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그리고 이미 그의 얼굴에는 지치고 피곤하던 전과는 달리 삶의 희망이 움트고 있었다. "좋은 아들을 두셨습니다." "저 때문에 아들놈이 고생 많았지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눈에는 이미 사랑과 감사의 이슬이 맺혀 있었다.

며칠 전에 속이 아프다며 환자는 다시 진료실을 찾았다. 키가 큰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 따라 움직이는 게 보였다. 고운 얼굴이 더욱 곱고 환하게 웃는, 키 작은 그의 아내가 숨듯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철철 넘치는 사랑을 나는 지긋이 바라본다. 함께 사투를 벌이며 공동의 사선을 넘어서는 그 세 사람의 치열한 결속. 남편을 위해 아버지를 위해 죽음의 가능성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그 사람들의 믿음과 깊은 사랑을 바라보면서 세상 어느 누구보다 아름다운 가족의 표상을 본다.

환자의 속이 아픈 건 아마도 인공 담도가 막힌 때문인 듯하지만 분명 그는 가족들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통해 그 어려움을 또다시 넘어설 것이라 믿는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들의 앞날이 그동안의 모든 고통을 갚을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행복하기를 빌어본다.

장기밀매란 오명으로 덧칠된 장기이식 의학은 이런 가족들을 통해 새로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항상 이 세상의 문제들이란 도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사랑과 헌신-- 모든 도구들이 그렇게 쓰여질 때 세상은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의 가족들로 가득해 질 것이 아니겠는가. 제발 그런 날들이 꽃 피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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