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한가위를 맞아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 꽃을 피워가고 계신가요? 그간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이웃 어른들께도 인사드리셨고요?

 

주말과 연휴에 특히 더 바쁜 응급실 특성상 우리 응급실 근무자들은 대부분 연휴기간 동안 고향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덕분에 매번 연휴만 되면 본의 아니게 불효자가 되지요. 섭섭해하시는 집안 어르신들께 전화로 인사를 대신한 게 언제부터인지 모릅니다.

 

사진_작가

 

다행히 저희 가족은 몇 년 전, 부모님께서 수도권으로 올라오시면서 연휴에 지방으로 가야 하는 부담이 줄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올 추석엔 가족들이 모두 모여 강화에 있는 외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자고 하셔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약속 날 아침, 부지런히 채비를 마치고 강화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미리 알아봐둔 가정식 백반으로 유명한 맛집에서 식사도 하고 아이들 재롱도 보여드렸지요. 이어서 외할아버지 산소에 도착해 간단하게 차례상을 보고 새로 태어난 증손주 소식도 전했습니다.

 

어렵게 온 가족이 모였는데 그냥 돌아가긴 아쉽지 않겠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의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오래전 강화 읍내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운영하셨던 목욕탕 말이지요. 제 어린 시절의 일부를 보낸 특별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진_작가

 

저는 어렸을 때 외가 댁에 오면 할머니가 한 분 더 계셨습니다. 서울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셨던 식당 일을 해주시는 분이셨죠. 외할머니댁이 목욕탕과 여관을 겸해서 식구들이 많았거든요. 항상 웃으시며 반기시고 많은 식구들 식사 챙기시느라 분주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서울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참 좋으셨어요. 그래서 외가에 갈 때엔 어떤 음식을 먹게 될까 기대도 많았죠. 한 번은 양념 꽃게장을 해주신 적이 있는데 정신없이 먹어치웠던 기억이 납니다. 매운 것을 잘 못 먹었던 제가 헛헛 거리면서도 맛있다고 먹는 모습이 재미있으셨는지 한동안 어른들께서 말씀하셨죠.

 

사진_작가

 

두 할머니의 인연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울 할머니께서 사정이 어려우실 때 저희 외할머니를 만나 집안일을 도우시며 어려움을 넘기셨다고 해요. 이 때 이후로 두 분의 동고동락은 30년을 넘게 이어지게 됩니다.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가 이런 관계일까요? 외할머니께서 목욕탕 일을 그만두신 뒤에도 어머니와 삼촌들은 강화에 가면 한 번씩 들러서 인사드렸거든요.

 

이번에도 어머니께서 한번 들러가자고 하셔서 서울 할머니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뵙느라 그사이 이사도 하셔서 댁을 찾는데 애먹었네요. 몇 번을 물어물어 드디어 할머니 댁에 도착했습니다. 저로서는 학생 때 뵙고 처음이니까 근 20년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어찌나 반가워하시던지 너무 오랜만에 찾아뵌 게 죄송할 정도였어요.

 

농담도 많이 건네시던 젊고 기운찬 예전의 할머니 모습은 어디 가고 백발의 호호 할머니께서 앉아 계시네요. 십여 년 전 오랜 투병으로 고생하던 할아버지를 떠나보내시고 혼자 적적하셨던 모양입니다. 어렸을 때 말썽부리던 석재가 그때 지만한 아들을 데려왔다며 더 반가워하셨습니다.

 

건강은 어떠신가 물으니 몇 년 전 온 뇌졸중으로 오른쪽을 쓰기 편치 않으시다고 하네요. 이후론 앉아만 지내신다는 말씀에 맘이 아팠습니다. 숟가락 쥐기도 불편해서 식사도 편히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오랜 시간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던 그 손도 세월의 풍파는 비껴갈 수 없었나 봅니다. 혼자 식사하기조차 어렵게 되어버린 병마의 가혹함이 야속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제대로 읽긴 어려우시겠지만 기념이라도 될까 싶어 제 책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앞쪽에 적어둔 짧은 감사편지를 읽어드리니 갑자기 엉엉 우시네요. 저도 따라 울컥해 왔습니다. 오늘 보면 마지막 아니겠냐고, 이렇게 만나고 나면 다음엔 또 만날 기회가 있겠냐는 말씀이 왜 이리 슬픈지요. 오늘은 기운이 없어 못 오셨지만 날 좋을 때 외할머니 모시고 한 번 더 들르겠노라고 약속드렸습니다.

 

서울 할머니 댁을 나서면서 인사오길 잘 했다는 뿌듯함, 연세 드셔서 고생하시는 모습에 대한 애잔함 등 여러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여생을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네요. 또 찾아뵐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할머니.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