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정도 되면 일종의 운명론자가 되는데, 살아온 것들이 이미 정해져있단 생각이 든다.

 

•정신과 입문 배경

중학교 다닐 때는 문예평론을 하려 했다. 전쟁 나고 혼란통이 되니 주변에서 만류를 했다.

두 번째는 타협해서 건축을 하려했는데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의과대 시험을 쳤다.

별 재미를 못 느끼며 의과대학을 다녔고 밤낮으로 소설만 읽으며 딴짓을 했다.

정신과 실습을 나갔는데 황량해서 ‘이건 지옥이 따로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가 싫다고 마구 날뛰고 도망가면 누르고는 뭘 이마에 대고

그런 후에 EST(경련)를 일으키는 것을 봤다.

이건 절대로 안 한다고 생각했다.

다 선량한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때 눈으론 뭐가 좀 이상해보였다.

안과를 하며 글을 쓸까하다가 정신과의 황량함에 결정을 하였다.

‘이 황무지를 내가 개척하자!’

그때 선배들에겐 미안하지만 분명 황무지였다.

 

전공의 인턴 시절

1959년엔 인턴 들어갈 때 전공을 정해서 스트레이트 인턴이라 불렀다.

정신치료를 배우고 싶었는데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고 책을 보고 혼자 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유학의 꿈이 보편화 되어있던 시대였다.

주로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Mental Mechanism 등을 열심히 배웠으나내가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넌 이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이론으로 느껴졌다.

 

분석심리학을 접하게 된 일화

어느 날, 타임지에서 실존분석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이것이야말로 공부할 만한 분야다.'

인간이 기계가 아니고 자유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는

이야기에 희망을 가졌다.

식민지 교육을 받아 일본어를 알아서 독일어에서 번역된 책을 읽었고 유럽에 가서 이걸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루드비히 빈스방거의 정신분열증’이라는 좋은 책이 있다.

‘와 멋있다!’ 라고 생각했다.

‘환자를 이렇게도 정의할 수가 있구나!’

‘정신분열병의 현존재분석적 해석’이란 종서를 썼는데 모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정신치료를 할 생각으로 분석심리학은 석사 논문을 쓰며 참고했다.

너무 복잡하고 꿈을 왜 이렇게 해석하는지 몰랐는데 당연히 처음 읽고 이해하진 못했다.

‘심리학과 종교’를 어떻게 바로 이해할 수 있겠나?

당시엔 그냥 인용만 하면서 ‘프로이트보다 뭔가 넓긴한데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스위스 융 연구소의 수련 제안

장학금을 받았는데, 스위스에서였다.

스위스에 융 연구소가 있단 것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오라는 제의를 받았는데 (당연히) 가지 왜 안 가겠는가?

전에는 비엔나의 프랑클에게 가려했는데 당시 프랑클은 실존분석에서 이론이 조금 약했다.

현지에서 공부하며 실존분석 강의에 가서 들으며 초기에는 왕래하다가 결국 융 쪽을 전공하겠단 결심을 하고 완전히 (융 학파로) 들어갔다.

 

융을 만나지 못한 사연

돌아가신지 몇 달 뒤였다. (융 연구소에 갔을 때는)

당시 문교부 직원이 서류를 허락하지 않았다.

부패하여 저녁이라도 사라는 뜻을 당시엔 눈치가 없어서 이해하지 못했고 마구 따지면서 몇 달을 지체하게 됐다.

그 일이 없었다면 악수라도 하지 않았을까?

 

 

[인터뷰 영상] 이부영 선생님의 발자취로 돌아보는 정신보건의 역사 (2)

[인터뷰 영상] 이부영 선생님의 발자취로 돌아보는 정신보건의 역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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