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_픽사베이

 

오늘은 응급실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응급실 주위엔 의료인은 아니지만 의료진과 식구처럼 가까운 분들이 있습니다. 응급실 내 질서유지와 폭력사태 방지를 위해 고생하시는 보안요원과 청소를 담당하시는 아주머니, 매 끼니마다 환자식과 직원식을 챙기느라 바쁜 영양사와 식당 아주머니 분들이지요. 또한 응급실 밖에는 의국에서 장부 달아 놓고 밥 시켜먹는 외부 식당 사장님 내외, 식사 때를 놓쳐 간식으로 허기를 때울 때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거리의 노점 아저씨처럼 병원 바깥에서 고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전공의 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 병원 근처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지나다니며 보니 아저씨가 나와 있을 때도 있고 할머니께서 나오실 때도 있었습니다. 헌데 아저씨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고 할머니는 등이 많이 굽어 불편해 보여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분들이었습니다.

 

평소보다 바람이 더 거셌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안과 전공의인 후배로부터 응급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선배, 길에 환자 한 명이 쓰러져 있어서 보안요원 통해서 응급실로 보냈어요. 우리 안과 다니시는 군고구마 장수 아저씬데, 길에서 쓰러져서 소리를 지르고 의식이 이상해서요.”

 

이 추운 날씨에 갑자기 길에서 쓰러졌고 의식이 이상했다면 제일 무서운 건 심뇌혈관질환입니다. 겨울부터 봄 초입까지는 혈관 수축으로 인해 뇌출혈, 뇌경색, 심근경색이 특히 많은 시기라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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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질환이기에 이 날씨에 길에서 쓰러져 이상행동을 보였는지 고민하던 차에, 응급실 입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환자 한 분이 카트에 실려 들어왔습니다. 검게 더러워진 두꺼운 옷과 신발을 신은 모습에 ‘연락 왔던 그 분이구나’하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환자는 보호자 없이 보안요원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진찰하면서 보니 환자 상태는 의식이 있고 팔다리는 다 잘 움직이는데, 진찰에 협조가 안 되고 마구 발버둥을 치는 상태였습니다. 이름을 물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더군요. 다행히 동공 반응은 정상이었고 사지가 다 제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뇌혈관 질환은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저혈당이나 고암모니아혈증 등 내과 대사질환이나 간질발작 후 상태 등을 의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이 간호사들이 손끝을 찔러 확인한 혈당 수치는 30, 저혈당이 확인되었습니다. 곧이어 접수가 되어 확인한 환자 기록에서도 당뇨병성 망막병증으로 안과에서 치료받았던 기록이 확인되었습니다. 경험 많은 우리 응급실 간호사들이 벌써 50% 포도당 수액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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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은 다시 평안을 찾았고, 잠시 후 저는 쿨쿨 자고 있는 환자를 깨워 보았습니다. 아저씨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어리둥절해하셨습니다. 이제는 이름도 정상적으로 대답하고, 집 주소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물어보니 최근 당이 잘 조절되지 않아 주사로 맞는 인슐린을 증량하는 중이었다고 하는군요. 식사를 잘 했음에도 인슐린 양 조절 실패로 저혈당에 빠져 추운 날씨에 길에서 쓰러졌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환자를 알아본 안과 전공의들이 점심식사 다녀오는 길에 환자를 발견하고 응급실로 보낸 것이었지요. 그나마 쓰러진 원인이 심뇌혈관질환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몇 시간 뒤 환자의 어머니인 할머니께서 응급실에 도착하셨습니다. 그간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그냥 나가면 또 쓰러질 가능성이 높아 입원하여 세심하게 인슐린 양을 조절할 것을 권유 드렸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비용 문제로 입원은 못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걱정되는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인슐린 양을 약간 줄이기로 하고 귀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병원 바로 근처에서 일하고 있지만 병원에 입원하기는 어려운, 환자와 병원 사이의 보이지 않는 높은 문턱을 확인한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이 분들은 성치 않은 몸 상태로 내일이면 또 다시 추운 날씨에 길에 나와 고구마를 파시겠지요. 겨우내 별 일 없기만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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