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_픽셀


훨훨 털고 떠난다고 ‘자유’가 아니다

 

결혼해방이라고 하니, ‘배우자와 이혼이라도 하려나, 훌훌 다 털고 멀리 떠나기라도 할 생각인가!’ 궁금해 할지 모르겠다. 필자가 이야기하려는 ‘결혼에서 해방’은 다른 의미가 있다.
많은 남녀가 결혼을 통해 행복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갈등하고 실망한다. 연애할 땐 대화도 잘되고 마음도 잘 챙겨주든 애인이 결혼 이후에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변신한다. 결혼 전 배우자의 모습을 믿고 결혼했는데 예상과 달리 너무 무심하고 소홀한 태도에 배신감을 느낀다. 어쩌면 배우자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많이 기대한 것인지 모른다.
배우자는 처음부터 지금 그대로였는데, 내가 배우자를 보고 싶은대로 본 것이다. 소극적인 모습을 차분한 모습으로, 독선적인 모습을 주도적인 모습으로, 감정기복이 심한 모습을 감성적인 모습으로, 우유부단한 모습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배우자에게 실망한 나머지 내가 결혼을 왜 했나 싶고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 든다. ‘어쩌자고 저런 인간을 만나 이 고생을 하나’ 싶고 억울하여 분통을 터트린다. 혹여 반대하는 결혼이라도 했다면 내 발등을 내가 찍은 격이라,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고 그 괴로움은 자책으로 이어진다. 이젠 모든 것 다 버리고 떠나고 싶은,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다.

 

간혹 못난 남자들 중엔 부부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도박이나 외도, 알코올 중독으로 일을 더 크게 벌이는 경우도 있다. 건강하게 부부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위로의 대상에게 회피하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식만 아니면 정말 툴툴 털고 떠나고 싶은데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마음을 접게 된다. 그렇게라도 벗어나고 싶은 것이 갈등하는 부부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피가 결혼해방일 수는 없다.

 

사진_픽셀

 

두 번 상처받았다

 

배우자에 대한 실망이 처음이 아니란 사실을 안다면 충격을 받을지 모르겠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데자뷰(deja lu)처럼 왠지 익숙한 그림자 같은 그런 느낌이 있다. 그렇다면 첫 경험은 언제일까?


그것은 당신이 사랑했던 부모에게 받은 어린 시절 상처다. 아픔을 두 번 다시 격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피해가지 못한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 억압된 상처는 당신을 지배하는 무의식적인 힘(energy)가 되었다. 더 이상 당신은 자신의 마음에 주인이 아니다.

 

불안과 상처는 두려움을 부추긴다. 지나친 좌절과 박탈은 억압이란 괴물을 만든다. 억압된 감정은 무의식이 되어 우리 삶을 파괴할지라도 반복을 되풀이한다. 억압된 감정은 왜곡된 관계의 원인이다. 왜곡된 감정은 의식도, 인식도 되지 않는다. 무의식적인 습관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또 다시 배우자와 두 번째 경험을 하고 자녀에게 세 번째 상처를 대물림 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 좌절을 경험한 30대 중반의 부부의 갈등을 들어보자. 여자가 조급하게 말을 시작한다.

”정말 미치겠어요. 선생님.”
남자는 멍하니, 말이 없다.

“선생님, 보세요. 이 사람은 절대 먼저 말을 먼저 걸거나 갈등을 해결하려 들지 않아요.”
화를 삭이며 여자는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에 열변을 토한다.

“선생님, 남편은 늘 저를 무시해요. 항상 잘하겠다고 하고서 정작 제 편이 되어 주지 않아요. 연애할 땐 다정하고 늘 잘 챙겨준다고 생각했어요. 뿐만 아니라, 제가 화를 내는 경우에도 같이 화를 내지 않고 저를 이해해주는 듯 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소극적인 것은 물론이고 항상 뒷전이에요.”

남편은 그래도 묵묵부답 말이 없다. 그는 상담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일주일 후 부부는 각자 상담실을 찾았을 때, 남편은 속내를 내비췄다.

“아내는 화가 나면 진정이 안돼요. 아이들도 부모도 안보이나 봐요. 욕도 너무 심하고 요즘 들어서는 폭력도 서슴지 않아요. 저는 참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을 때 폭발하고 마는데 그러고 나면 한 달씩 말없이 생활합니다. 저도 문제지요. 그러나 아내도 정말 미치게 합니다. 지난 주 상담 때 말을 안한 것도 돌아가면 싸울게 분명하기 때문에 참은 거죠.” 

 

부부는 서로에게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녀가 남편에게 감정이 폭발하는 이유는 그녀가 억울한 일에 처했을 때 남편은 아내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 남편에게 예민하게 된 것은 어린시절 상처 때문이다. 여자의 부모는 그녀를 남동생과 늘 차별하였다. 문제는 차별보다 부모의 폭발적인 부부싸움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부부싸움을 하면 집안 물건을 부수고 엄마와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였다. 그녀와 동생도 공격적인 아이로 변하고 말았다. 결국 또래와 싸움이 잦았고 거친 아이가 되었다.

 

남자는 홀어머니 아래서 외롭게 자랐다. 그는 착한 아이였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귀한 아들이기는 했지만 어머니 혼자 자식을 키우다보니,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렸다. 자연히 아들은 혼자서 시간을 외롭게 보내야 했다. 마음이 약하고 여린 그는 착실하지만 또래관계는 어려웠다. 늘 착한 아이, 모범생 소리를 들었지만 조용하고 위축된 아이였다.

 

부부는 어린 시절 상처가 많았다. 그래서 자신은 따뜻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회피적인 태도는 여자에게 피해의식을 자극했다. 남자는 법 없이 살만큼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아내에게 편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또한 여자의 공격적인 말투와 피해의식은 남자의 회피적인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부부의 첫 번째 상처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두 번째 상처는 서로에게……. 두 번 상처를 입었다. 친정부모도 내편이 되어주지 않았는데 남편마저 여자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갈등을 거칠 줄 몰랐다.

 

사진_픽셀

 

배우자에 대한 이해보다 자기이해가 먼저다

 

자기이해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많은 부부들이 부부 상담을 받으면 솔루션(Solution)을 생각한다. 상담자가 몇 마디 말로 자신의 문제를 기적처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가 생각이 다르고 습관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부부가 생각 차이로 갈등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부부갈등이 왜곡된 마음 때문이라면 그 아픔 마음에 관하여 고민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례에 제시된 여자는 어린 시절 부모의 차별로 상처를 입었다. 여자에게 차별은 피해감이 되었다. 마음이 왜곡되었으니, 어떻게 배우자의 마음을 바로 볼 수 있을까?

 

그녀의 피해감은 그녀의 성격이 히스테릭(Hysteric)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남편이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 그녀의 피해감은 억울함의 절정이 되었다. 부모가 자녀를 비교하고 차별하는 것은 여자의 마음에 억울한 괴물을 만든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피해망상으로 발전하여 병이 된다. 많은 여자들이 부모에게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다. 그녀는 부모의 차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결혼이란 자유를 꿈꾸었다. 하지만 결혼이 해방일 수는 있겠는가? 그녀가 피해감이란 보따리를 가지고 왔으니, 그 보따리를 풀어헤칠 때마다 그곳이 그녀의 감옥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히스테릭(Hysteric)의 어원처럼 이해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노여워’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이해받지 못했다고 피해감에 젖어 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노여움, 분노감이 피해망상이란 괴물을 만드니 말이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지, 차별 받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예상할 수 없는 장막이다. 살다보면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고 선택하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처하고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억울한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시련을 부정하고 회피해보지만 결국 방황 끝에 우리가 상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용서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쇼생크탈출’이란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죄수를 주제로 다룬 영화로 10년 이상의 실형과 종신형이 대부분인 죄수들의 삶을 그린 영화다. 그들에게 희망은 없다. 그들은 탈출이후의 삶을 꿈꾼다. 하얀 해변에서 어부로 고기를 낚는 평화로운 삶을 말이다. 희망이라곤 꿈꿀 수 없는 그들에게도 해방(석방)의 기회가 있다. 종신형의 죄수가 노인 되었을 때, 비로소 가석방을 시킨다. 그들은 젊어서 쇼생크 감옥에 감금되어 청춘을 다 보내고 노인이 되어 자유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 오랜 세월을 세상과 등진 걸까?

 

그들을 기다리는 세상은 해방이나 자유는 없다. 그저 늙은 몸과 지친 마음 뿐…! 그들에게 해방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노인은 무의미한 삶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마음이다. 꼭 부부의 삶이 아니라더라도 삶을 살면서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이란 무엇일까?


“남편(아내)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자녀의 불치병이 부모를 너무 고통스럽게 합니다.”

“직장의 상사가 힘들게 해요.”

 

우리는 언제나 고통 속에서 살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통을 회피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수용하게 된다. 성경 말씀처럼 삶이란 행복해지기 위함이 아니라, 거룩하기 위함이다. 거룩함은 절제와 온유함이라고 하지만 절제하기까지 그리고 또 온유해지기까지 감당해야했을 삶은 얼마나 힘겨웠을가? 아픔을 직면하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상처받은 마음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난생 처음으로 내 아픈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해방이 아닐까?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