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S씨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이직을 해야 할지,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을 계속 해야 할지 3개월째 고민 중인 자발적 백수입니다.

 

제 직업은 방송작가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저는 자발적 백수입니다. 이 자발적 백수 생활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막내시절 프로그램이 끝난 뒤 6개월을 쉬었고 서브작가가 된 뒤에도 1년간 일을 하고 6개월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3개월 째 쉬고 있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처음엔 번아웃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업무강도가 강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이니까요. 친구를 만나 밥 한 번 먹을 시간도 없고. 취미생활은 커녕 잠잘 시간도 없는 하루 하루를 그저 일이 좋다고 버텼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버티는 게 힘들더군요. 내가 정말로 이 일을 좋아하는지 고민도 됐고요.

 

첫 번째 백수생활을 떠올려보면 처음부터 자발적이었던 건 아닙니다. 시즌제 프로그램이 끝났고, 오래 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구직이 안 되어서가 아닙니다. 이력서를 넣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6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이력서를 넣고도 면접을 보러 가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내가 일을 하려고 한다면 언제든 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벌어둔 돈을 까먹으며 지냈죠. 왜 그렇게 긴 시간을 그냥 보냈던 걸까요?

 

두 번째 백수생활은 정말로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막내작가에서 서브작가로 일종의 승진을 했는데 업무 강도는 더 심해졌습니다. 이번 방송을 끝내고 돌아서자마자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 급박함, 아이템이 잡히지 않으면 일주일에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고 적어도 하루는 밤샘을 해야했죠. 변수가 많은 일이라 스트레스도 상당했습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일하니 내가 소모되는 것 같고 이렇게 일하다보면 병이 나겠구나 싶어 그만뒀습니다.

 

6개월 뒤,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저는 일하기 전에 했던 고민들을 모두 버리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아이템을 찾고 섭외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프로그램이었죠. 머리로는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더 노력하면 된다고 해보자고 다짐해도 몸이 따르지를 않았습니다. 금방 피곤해지고 집중력도 떨어져서 밤을 새야겠다고 앉아서는 골아떨어지기 일쑤였고, 일을 해낼 자신감도 의지도 없어 그만뒀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백수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백수생활을 돌아보면,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비가 없을 때는 탈 없이 계속 다음으로 이어지다가 고비가 와서 멈춰서면 다시 시동을 걸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구직이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은 없지만 일을 해나갈 자신이 없고 버텨낼 자신이 없습니다. 번아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전 방송에서 말씀하셨던 회피성 성격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대학시절 친구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휴학을 선택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과 친구가 갑자기 저에게 말을 걸지 않고 없는 듯 대했거든요.  동아리 사람들과는 잘 지내서 학교 내에 제 공간, 제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수업시간마다 그 친구를 마주하는 게 힘들어서 휴학했습니다. 복학한 뒤 관계 정리를 했지만 제가 먼저 손을 내민 건 아니고, 우연히 길에서 만났을 때 친구가 사과를 해서 받아준 게 전부였습니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먼저 다가가기보다는 상대가 저에게 호의적인지, 저와 잘 맞는지 먼저 살핀 후에 마음을 엽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어울리는 게 불편한 것 같습니다.

 

제 이런 성향이 자발적 백수생활이 길어지는 원인 중 하나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성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혹시 번아웃 증후군이라면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일은 없었으면, 브레이크를 걸더라도 침착하게 시동을 걸 수 있게 됐으면 합니다.

 

사진_픽셀

뇌부자들의 답장:

평소에 저희가 보는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연을 읽었습니다. 저희도 팟캐스트 방송을 하다 보니 공감이 많이 되기도 했습니다. 압박감이 얼마나 크고 무거우면 ‘자발적 백수 생활’을 택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했네요.

 

지금의 상태가 ‘번아웃 증후군’이 아닌지 궁금하다고 하셨네요. 번아웃 증후군은 ‘증후군’이라는 말이 붙다 보니까 의학적인 질병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 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말은 아니에요. 미국의 정신분석의사 허버트 프뤼덴버그(Herbert Freudenberger)가 처음 사용한 심리학 용어인데 우리 나라 말로는 탈진 증후군, 소진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1980년대부터 사용이 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쓰이고 있죠. 어떠한 일에 몰두하다가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계속 쌓여 무기력증이나 심한 불안감과 자기혐오, 분노, 의욕 상실 등의 증상이 몰려오는 것을 뜻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번아웃 증후군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지표가 있어요. 스트레스성 뇌 피로증이라고도 하는데요. 특징적으로 번아웃 증후군에서는 수면의 질이 나빠지고, 건망증이 심해지고, 성격이 변한 것처럼 짜증이 늘어납니다. 수면의 질이 나쁘다는 건 일반적으로 말하는 불면증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어서, 실제로 잠을 잘 못 자기도 하지만 ‘푹 못 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도 피로감이 남는다.’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잠을 자긴 했는데 충분히 휴식이 되지는 못한거죠.

그리고 자꾸만 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건망증이 생기는데, 이건 실제로 뇌 기능이 퇴행돼서 생긴다기 보다는 집중력이 떨어져서 기억을 못 하는 현상이라 기억력 검사를 해 보면 정상으로 나오곤 해요. 마지막으로 감정 기복이 생기는데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되기도 하죠. S씨께서도 저희가 말씀드린 것 중 얼마나 해당되는지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해 볼 수 있는 번아웃 증후군 체크리스트가 있습니다.

 

1. 맡은 일은 수행하는데 정서적으로 지쳐 있다.

2. 일을 마치거나 퇴근할 때 완전히 지쳐 있다.

3.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생각을 하면 피곤하다.

4. 일하는 것에 심적 부담과 긴장을 느낀다.

5. 업무를 수행할 때 무기력하고 싫증을 느낀다.

6. 현재 업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 들었다.

7. 맡은 일을 하는데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다.

8. 나의 직무 기여도에 대해 냉소적이다.

9.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쾌락을 즐긴다.

10. 최근 짜증, 불안이 많아지고 여유가 없다.

 

위의 체크리스트 중 3개 이상 해당되면 번아웃 증후군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저희도 일이 많아질 때면 ‘번아웃’ 돼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누워 있을 때도 있었는데요. S씨께서 말씀하셨듯이 방송 작가 일이라는게 정해진 시간 안에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하나를 만든 뒤에, 다시 바로 다음 것을 이어서 해야하는 만큼 정말 소진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사진_픽셀

 

그런데, S님께서 저희 방송 중 우울증 방송을 들어보셨다면 우울증하고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 의아하실 수도 있어요. 우울증에서도 특징적으로 기분이 가라앉거나 짜증이 많이 나고, 무기력하고, 기억력도 저하되는 증상들이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번아웃 증후군과 우울증이 거의 90%는 진단이 일치한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만큼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번아웃 신드롬은 어쨌든 증상을 일으킨 원인이 뚜렷하게 있다는 거죠. 다시 말해서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해결되면 증상도 나아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되고요. 하지만 명확한 원인이 있더라도 사실 그 원인이라는게 먹고 사는 직업에 관한 것이라 해결을 하기가 쉽지는 않으니 정말 답답하실 것 같아요.

 

저희들은 S님의 상태를 번아웃 증후군 뿐 아니라 ‘회피’라는 측면에서도 생각을 해 봤습니다. 원인을 알아도 해결하기 힘들다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회피’라는 방어기제가 작동할 수 있어요. 물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후라면  바로 뭔가를 바로 시작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충전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바람직할 때가 있죠. 문제는 이 상태가 오래 지속이 되는 것인데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동증으로 진행할 수 있거든요. 당장은 부정적인 감정을 겪지 않아도 되니 편할 수 있지만 계속 지속이 되면 즐거운 일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S씨께서도 한참 쉬고 난 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다시 일을 시작하셨지만, 생각과 달리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셨다고 하셨죠. S씨께서는 회피성 성격인 것 같다고 표현을 하셨는데 동아리에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고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직업인 방송 작가 일도 계속 해오신 것을 보면 회피성 성격보다는 ‘회피’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그 감정을 처리하지 않고 돌리거나 상황 자체를 피해버리는) 패턴을 가지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라는 직업 환경에서 겪는 육체적, 감정적인 스트레스가 심하다 보니까 원래 S씨가 가지고 계신 회피의 방어기제가 더 고착화 된 것 같고요.

 

지금까지 S씨의 상태를 ‘번아웃 증후군’과 ‘회피’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업무 스트레스를 견디는 역치가 낮아지고 일을 다시 하면 버텨낼 자신이 없어’ 일 하는 것 자체를 회피하게 된 상황이신데, ‘방송 2개를 끝마치고 나면, 3개월의 휴식시간을 나에게 준다’라는 식으로 루틴을 정해놓고 일하시는 건 어떨까요?  쉬게 될 때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좀 더 맘 편히 쉴 수 있을 것이고, 일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도 조금만 더 참으면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니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 자기 효능감, 자기를 컨트롤 하는 느낌을 되찾을 수 있는 무언가를 시작해 보시는 것은 도움이 될 겁니다. 아주 사소한 계획들, 열흘동안 하루 10분씩 걷기나 야외에서 햇빛 쬐면서 움직이기 같은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사소한 목표들을 달성하는 연습이 반복되면 업무에 복귀해서도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현재 상태가 단순히 번아웃이 아니라 우울증은 아닌지도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 번아웃 증후군은 우울증과 진단이 90%까지도 일치할 수 있는데, 우울증이 맞다면 약물치료나 인지행동 치료 같은 일반적인 치료 방법이 도움이 될 수도 있거든요. 우울증인데 번아웃 신드롬으로 잘못 진단을 하게 되면 치료 시기를 놓쳐서 병이 악화되기도 합니다.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계신 분들은 휴가를 다녀오는 식으로 재충전을 하면 어느정도 회복이 되는 반면에 우울증 환자 분들은 일상적인 즐거움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즐거운 활동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고, 일을 쉬면서도 되려 무기력감이나 자책감, 무가치감이 심해질 수도 있거든요. 저희가 위에서 체크리스트를 소개 해 드렸지만, 번아웃 신드롬이라고 자가 진단해서 확진하는 건 좀 위험할 수도 있어요.

 

마지막으로 S씨 스스로도 자신의 성향에 대해서 고민을 해오셨는데, 저희가 오늘 드린 이야기도 참고해서 변화하고, 움직여 보려고 해보세요. 처음에는 별다를 것 없다고 느껴지더라도 나중에는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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