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전 시간, 이 시간 저희 응급실은 평소보다 여유 있는 편입니다. 외래가 열려있는 시간인 덕에 병세가 위중하고 급한 분이 아니면 외래에서 진료를 받기 때문이죠. 그 말은 평일 낮에 응급실에 오시는 경우는 그만큼 급하고 위중한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19 구급차를 타고 할머니 한 분이 오셨습니다. 갑자기 숨차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신고되었다고 합니다. 응급실 침상으로 환자를 옮기기 위해 의료진들이 일거에 달려들었습니다. 옮기면서 보니 의식은 멀쩡하지만 할머니 입술에 혈색이 없고 약간 푸르스름한 게 왠지 느낌이 서늘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급히 심전도 모니터링을 붙여보니 심박동이 느리다 못해 한참만에 한 번씩 뛰고 있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아이고, 이것 큰일이네. 한 명 어서 라인 달고, 혈압은 어때요?"

집에서 혼자 있다 오셔서 보호자도 따로 없는 상황. 갑작스러운 중환자의 등장에 의료진들의 움직임이 빨라집니다. 어찌 보면 잘 준비된 한 편의 연극 같습니다. 배우 한 명은 오른쪽 팔에 붙어 수액 라인을, 한 명은 왼쪽 팔에 붙어 혈압을 재고 모니터링을 달고 있습니다. 다른 배우 한 명은 할머니 머리 쪽에 서서 의식과 체온을 확인하고, 또 다른 한 명은 할머니 가방에서 신분증을 찾아 원무과 쪽으로 뜁니다.

"신분증 찾았어요!"

라는 대사와 함께 말이죠.

 

사진_픽사베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혈압은 아주 미약하게나마 측정이 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느린 심박동과 함께 의식이 없고 혈압도 안 잡혔다면 심정지 프로토콜에 따라 심폐소생술을 해야할 판이니까요. 아슬아슬하게 심정지의 경계에 서 계신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할머니께서 숨찬 원인이 심장이라는 건 단박에 확인이 되었고 이제 빠른 치료만이 남았습니다. 아트로핀이라는 심박동을 자극하는 약물을 주사로 드리면서 반응을 지켜보기로 합니다. 그 사이 접수된 할머니의 기록을 보니 마침 저희 병원에서 심장내과 진료를 본 기록이 있습니다. 심방이 불규칙적으로 빨리 뛰는 심방세동과 이로 인한 반응성 빈맥이 있었네요. 그런데 그 아래에 특이한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드님 한 분이 심장 원인으로 급사했고 다른 한 아드님도 심질환으로 진료를 받고 있다는 기록입니다.

이 기록을 보는 순간, 왠지 할머니의 생명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이 생겼습니다. 아드님을 심장질환으로 먼저 보내고 마음고생했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거든요. 아트로핀에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심장내과와 협진을 시작했습니다. 심장내과 선생님이 소식을 듣자마자 인공 심박동기를 삽입하자고 하네요. 그동안 바이탈을 꼭 붙들어달라는 부탁도 함께 받았습니다. 이제 응급실 의료진의 목표는 할머니께서 시술에 성공할 때까지 할머니의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표까지 고지가 머지않아 보입니다.

시술 동의는 보호자가 옆에 없어 전화로 설명하고 받기로 했습니다. 아드님이 전화를 받았는데 침착하게 최선의 처치를 부탁하십니다. 이런 일이 언젠가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듯 한 침착함이었습니다.

동의서, 소변줄, 헤어 정리 등 시술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혈관조영실로 환자를 출발시켰습니다. 그동안 할머니의 혈압이 유지되고 푸르스름한 입술도 조금 돌아와 다행입니다. 시술을 잘 마친다면 불안정한 느린 심박동도 안정화될 겁니다. 중환자실 자리를 하나 예약해놓고 응급실 의료진은 한 숨 돌립니다.

 

사진_작가

시술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응급실로 돌아온 할머니의 심박동은 안정되어 있었고 혈압도 정상범위입니다. 할머니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네요. 옆구리에 붙은 기계가 다리 혈관을 타고 들어가 할머니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도록 전기신호를 주고 있는 것이겠죠. 같은 병원 의사 선생님의 작품이지만 자주 시행하는 시술은 아닌 덕에 저로서는 신기할 따름입니다.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시술을 마친 심박동 모니터와 기계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께서 아침에 실수로 약을 두 번 드셨다고 합니다. 며칠 중환자실에서 지켜보고 나면 할머니의 심장기능도 다시 돌아오겠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드님이 할머니의 심장을 지켜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사진_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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