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혀가 당신을 귀먹게 할 것이다.”

- 체로키 인디언

 

 

기자에서 정신과 의사, 다음은 소설가!

정신과 의사 류미는 왜 소설 《리스너》를 썼을까?

 

좌_리스너(출판사:이요재) 우_저자 류미

 

휠체어 탄 정신과 의사. 지금까지 류미 작가를 소개할 때 주로 쓴 표현이다. 그는 현재 국내 유일한 치료감호소인 국립법무병원에서 일한다. 주로 만나는 사람이 정신질환자이자 범법자라는 이중의 굴레를 쓴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연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고 말할 때 그의 눈이 반짝 빛난다.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출간했고 《리스너》는 첫 소설이다. 이제 ‘소설 쓰는 정신과 의사’로 불러야겠다.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한 것은 10년 전쯤이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을 앞두고 중앙일보 입사 시험에 지원했다. 최종 면접은 1박 2일 간의 등산. 고등학교 3학년 때 양쪽 발목을 다친 뒤로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고 30분 이상 걷지 못하는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경향신문에 입사해 편집기자로 일했다. “기자로 일하던 20대의 어느 날. 열 명쯤 모인 회식 자리에서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마이크를 쥔 부장만 빼고. 그때 깨달았다. 세상에는 말하고 싶은 사람이 듣는 사람보다 백배쯤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넘치는데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수요와 공급의 엄청난 간극. 시장 용어로는 블루오션. 내가 다음 가야 할 길이 정해졌다.”(<작가의 말> 중에서)

 

‘내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으니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게 해야 한다’는 고민 끝에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가톨릭대학교 의학과로 편입했다. 100번쯤 시험을 보고 나니 정신과 레지던트가 됐고, 국립부곡병원에서 일하던 어느 날 “아들이 말을 하지 않는다며 부모가 상담을 신청해왔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직업을 가진 부모의 외아들이었다. 상담실 밖으로 부모를 내보내고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상담은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때 진실을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세상에 과묵한 사람은 없다. 다만 내 말을 들어줄 대상, 상황, 타이밍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작가의 말> 중에서)

 

사진_픽셀

 

스피커와 리스너에 관한 진실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해 잘 들어주고, 정확하게 질문하는 경청의 기술

 

소통의 시작은 경청이다. 그럼에도 대개 말 잘하는 사람의 스피치 능력은 높게 평가하면서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의 경청 능력은 과소평가한다. 경청 능력을 판단할 기준이 뚜렷이 없어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잘 듣는 사람이 없다면 말하는 사람도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또한 상대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원만한 대화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소통이 안 된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를 자주 듣는다. 불통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자기 말만 하고 타인의 말은 듣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모모》로 잘 알려진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는 “경청이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반만이라도 할 수 있나 시험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류미 작가는 “정신과 의사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죽했으면 “정신과 의사는 치매가 걸리면 환자를 더 잘 본다”는 말까지 있을’(133쪽) 정도로 경청은 프로 리스너인 정신과 의사들에게도 힘든 일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체력이 소진되는 일이다. 듣는 일은 뇌를 쓰는 일이고, 뇌의 에너지원인 포도당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피곤한 상태로는 상대의 말을 들어줄 여력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므로.”(<부록> 중에서)

 

과연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이비 힐러들은 입으로만 말한다, “내가 너의 인생을 바꿔주겠다”고. 소설의 주인공 송재림은 입을 뺀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해 경청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머리로 느낀다. 그는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가 입을 열 때는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질문할 때뿐이다.’(<작가의 말> 중에서)

 

 

재벌 회장, 유명 연예인들의 주치의인 정신과 의사 유지니가 리스너를 찾아왔다 .... 그리고 그녀가 죽었다

 

외모, 학벌, 집안 모두 평범하지만 경청 능력만큼은 천재적인 리스너, 송재림. 진주의 중소 건축회사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어려서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후 말을 못 하게 된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자랑인 아이큐 168의 형은 성적표로 부모님께 효도했고, 아이큐 115의 송재림은 어머니의 눈과 입이 되는 것으로 효도했다. 학창 시절부터 말수가 적지만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라 주위에 친구가 많았다. 별다른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며 지내던 중 자신의 경청 능력을 차츰 깨달으면서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 리스너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성북구의 한 오피스텔에 ‘리스너’ 사무실을 연다.

 

이 오피스텔에는 비슷한 고객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업종인 교회가 9층에, 신점집이 6층에 있다. 정글이다. 리스너를 방문하는 사람이 느는 만큼 교회와 신점집의 견제가 비례하고, 파킨슨병을 앓는 남편을 지켜봐야 하는 빵집 사장과 80대 부인의 바람을 의심하는 70대의 전직 은행장 등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다양한 사람들, 다채로운 사연들을 만날수록 송재림의 경청 능력은 나날이 발전한다. 그럴수록 말의 무게에 짓눌리는데…. 그러던 어느 날, 미모의 정신과 의사 유지니가 상담을 신청해온다. 재벌 회장, 유명 연예인들의 주치의기도 한 유지니는 지금까지 송재림이 만난 사람들과는 접근 방식도, 고민의 성격도, 비밀의 무게도 다르다. 그녀의 진짜 이야기를 다 듣지 못했는데, 그녀가 죽었다.

 

사진_픽셀

 

세상에 말 없는 사람은 없다. 말할 타이밍, 상황, 대상을 만나지 못했을 뿐

경청 천재가 말하는 경청의 기술

 

리스너를 만나면 사람들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속에 담아둔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심지어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직업인 정신과 의사 유지니조차 리스너 앞에서는 말이 많아졌다. “제가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 선생님께는 이렇게 말이 많아져요. 어때요, 선생님. 승리하신 기분이 드나요? 하지만 섣부른 승전보는 금물이에요.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세상에 말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요. 다만 말할 타이밍, 상황, 대상 같은 것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만 있을 뿐이죠.”(178쪽)

 

듣는 대상이 되어 말할 타이밍,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 리스너의 강점이다. 이 자질은 상대방의 말을 독해하는 능력과 상황 판단력까지 포함한다. 류미 작가는 “독자들이 《리스너》를 재미있게 읽기를 바란다. 못지않게 읽고 난 뒤 남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며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익힌 경청의 기술을 짧게 정리해 소설 마지막에 <부록>으로 덧붙였다. 요약하면, 잘 듣기 위해서는 감각기관을 총동원해야 한다. 눈으로 관찰하고 귀로 듣고 머리로 느끼고 정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을 열어 ‘질문’을 한다. 화자가 사로잡혀 있는 생각에서 거리를 두고 판단할 수 있는, 치우친 생각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적절할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을 잘하려면? 잘 들어야 한다! 선순환이다.

 

 

{ 저자 소개 }

◉ 류미

박리성 골연골염으로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고, 30분 이상 걷지 못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양쪽 발목을 크게 다쳤다. 깁스를 한 채 대학입시를 치르고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에 입학했으나 1학기 만에 자퇴했다. 문학을 막연히 동경해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안고 대학신문 기자에 응시했다. 응시 시험 문제는 자기소개. 그리고 “이 종이 한 장에 나 자신을 소개한다고 해서 당신들이 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적어 제출했다. 현실에 대한 의심을 기자의 최고 덕목으로 생각한 선배 기자들은 이 건방진 자기소개에 최고 등수를 부여했다. 신입생이던 그해 여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멋진 연애를 꿈꾸었다가 선배 기자로부터 “문제의식이 없는 프티부르주아”라는 말을 듣고 대학신문을 나왔다. 여전히 최고의 연애소설로 《상실의 시대》를 꼽는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중앙일보 입사 시험에 지원했지만 1박 2일 간의 등산이라는 최종 면접 관문에서 중도 포기해야 했다. 이후 경향신문에 입사해 편집기자로 일했다. 2년쯤 지나니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내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으니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게 해야 한다’는 고민 끝에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가톨릭대학교 의학과로 편입했다. 100번쯤 시험을 보고 나니 정신과 레지던트가 되었다. 경남 창녕의 국립부곡병원에서 보낸 레지던트 때의 경험을 기록한 수기를 2011년 조선일보 논픽션대상에 응모, 대상작 없는 유일한 수상작이자 우수상으로 선정됐다. 그해 환경재단이 발표하는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33인’에 선정됐다. 논픽션 《도전받은 곳에서 시작하라》(2011 조선일보 논픽션대상 우수상), 《동대문 외인구단》(2014 세종도서 문학나눔 부문)을 출간했다.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집단주의와 권위주의를 가장 싫어하는 개인주의자. 나르시시즘과 니힐리즘이 반반쯤 섞인 타고난 한량. 자신의 즐거움을 좋아하지만 매너 있는 쾌락을 추구한다”고 대답하는 저자는 현재 국립법무병원(치료감호소)에서 일한다. 주로 만나는 사람이 정신질환자이자 범법자라는 이중의 굴레를 쓴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연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아서 작가로서 영감을 받으며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다.

 

사진_ 류미ⓒ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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