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픽사베이

지난 크리스마스,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방영된 11세 소녀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짓게 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분노를 피어오르게 했다. 친아버지에게 감금과 폭행을 당해온 A양은 아버지의 처벌을 원하냐는 질문에 힘없는 얇은 입술을 움직여 분명한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A양은 지난 12월 12일, 영하의 추운 날씨에 반바지에 맨발로 돌아다니는 가냘픈 여자아이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슈퍼마켓 주인의 제보로 알려졌다. 취재진과 경찰의 조사 결과 A양은 아버지와 아버지 동거녀들과 함께 살면서 수년간 수없이 맞고 굶주리며 지내왔었음이 밝혀졌다. 일주일 가까이 밥 한톨 없이 굶고, 너무 배가 고파서 어른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몰래 먹다 들키는 날엔 쇠파이프나 행거로 얻어 맞기도 했다. A양의 아버지는 ‘꼴 보기 싫다’며 1평도 되지 않는 세탁실이나 화장실에 A양을 가두고 손과 발을 노끈으로 묶어두기도 했다. 결국 A양은 굶주림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가스배관을 타고 2층집에서 탈출한 것이었다. 발견 당시 A양은 키 120cm에 몸무게 16kg으로 깡마른 채 늑골이 부러지고 신체 곳곳에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다.

A양은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보호 받으며 병원에서 건강과 심리적 안정을 회복을 취하고 있다. 사연이 방송을 통해 소개되고 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의 후원금과 각종 선물이 도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A양의 사연으로 새삼 어른들을 주목시킨 ‘아동학대’라는 끔찍한 악몽은 지금도 여전히 도처에서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눈물짓게 하고 있다. 그 악몽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어 아이들의 자아와 인격에 새겨지고 있다. 영혼이 병든 어른들은 악마가 되어 다시금 아이들의 영혼을 병 들게 하고 있다.

뉴욕 Rochester 대학의 Cicchetti 박사 연구팀이 JAMA에 게재한 최근 연구에서는 1986년부터 2012년까지 저소득층 아이들을 모집하는 여름 캠프를 매년 개최하여, 총 2292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아이들에게 아동학대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성적학대나 폭력 이외에도 무시나 폭언과 같은 정서적 학대 또한 아이들의 인종이나 성별, 특성에 관계 없이 모두 정신적 고통과 정신과적 질환을 유발하였음이 밝혀졌다.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받은 아이들은 대부분 우울증이나 불안, 신체화증상 등의 신경증적 증상을 중등도 이상의 심각한 수준으로 보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대를 받은 아이들은 분노 조절이나 공격성 조절에도 어려움을 보이며, 규칙 위반이나 비행, 폭력에 휘말리는 경우가 학대를 받지 않은 아이들 보다 유의하게 많았다.

생명의 위협이나 그에 준하는 강한 스트레스는 정신적 외상(trauma)를 유발한다. 이는 일반적인 스트레스에 따른 반응성 신경증과는 다른,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라 하는 독특한 유형의 임상 증후군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A양의 경우와 같이 장기적으로, 특히 어렸을 때 만성적이고 반복적인 정신적 외상을 겪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PTSD와는 다른 양상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만성적 외상의 생존자(chronic trauma survivor)에서 나타는 심각한 PTSD인 이와 같은 정신적 질환은 complex PTSD라고도 일컬어진다. Judith Herman이 처음 기술한 이 질환은 현재 정신과 진단 통계 편람인 DSM V에서는 모두 같은 PTSD로 포함되고 있지만 그 특징과 치료에서는 특별한 고려를 필요로 하고 있다.

complex PTSD 환자들은 일반적인 PTSD 증상(무감동증, 분노, 해리증상 등)과 함께 자아개념(self concept) 자체의 변화를 동반한다. 완전한 고립무원감, 무기력감에 압도되거나, 부적절한 수치감, 자괴감이나 죄의식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인격적인 변화와 불안정성을 초래하기도 하여 치료하기 어려운 증상으로 고착되는 경우도 많다. 괴로운 증상과 기억을 잊기 위해 술이나 마약 등의 남용에 빠지고 자해를 반복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아동학대는 단순한 외상적 기억에 의한 고통뿐 아니라 아이의 인격과 자아 자체를 잠식하고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A양 사건으로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정부의 대책이 부실하다는 비판이 쇄도했고, 새누리당은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합동 당정협의를 개최했다. 김정훈 정책 위원장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아동학대는 사전예방이 더 중요하다’고 목소리 높이며 법안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A양의 끔찍한 희생이 알려진 이후에 급진되고 있는 협의라는 점을 생각할 때, 사전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습이 다소 아이러니컬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앞으로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사회의 관심과 제도 개선이 필수적인 것 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가난과 빚을 물려주는 것보다 잔인하고 무서운 것은 어른들의 병 들고 곪은 영혼을 아이들의 인격에 새겨 넣어주는 것이다. A양 사건을 보며 끓어오른 분노와 애끓는 동정심만큼이나, 지금 이 순간에도 매 맞고 외면 받고 있을 또 다른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성숙한 손길이 시급할 것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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