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 후 1997 ~ 현재(2017)

 

분석심리학의 전문 교육, 연구, 상담기관으로 한국융연구원을 설립(1997.10.), 개원(1998.3.1.) 하고 교육과 연구에 매진해오는 동안 나의 관심은 점차 인간의 무의식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표면상의 환자보다 환자를 치료하는 상담가, 의사들을 분석하면서 ‘이 세상에 환자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모두 환자이기 때문이다’라는 통찰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자살예방이라던가 정신과 환자에 대한 차별 철폐에 관한 세계보건기구의 표어를 연구원 회보에 싣기도 하고 WHO 정신보건관계 책자를 번역하여 대중매체에 배포하기도 했으나 분석심리학의 교육, 연구, 저술, 번역 등에 주력하다보니 정신보건법에 대한 관심도 희박해졌다. 직접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한 때 정신보건에 관심을 가지고 일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의 조언을 구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나의 경험에 의하면 정책 수립에 ‘월반’은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나라가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정신보건법을 아주 훌륭하게 만들면, 뒤늦게 시작했지만 선진의료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이브한 생각이다. 이상적인 정신보건법 안이 정부 부처를 돌아다니다가 완전히 후퇴된 형태로 바뀌어버리는 현상을 너무도 자주 보아왔다.

우리도 다른 나라의 실수를 고스란히 경험하고 혼나고 반성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모든 정책 수립과 그 구현의 일반 공식인 것 같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니면 정부만 상대할 것이 아니라 그 대부분의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도록 홍보하고 교육하여 장기 계획을 세워 그들의 의식 개혁을 꾸준히 도모해야 한다.

 

2. 그러므로 나는 정신보건을 올바로 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정신보건에 관한 교육 계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교육 대상은 전 국민이며, 법조인, 경찰, 일반 의사들, 공무원, 매스미디어 종사자, 국회의원 등 입법부 관련자들, 종교인, 교사, 무엇보다 초등학교부터 정신건강에 대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

취리히 대학 사회정신의료부의 우흐텐하겐 교수는 취리히에 망연하던 약물 중독 환자가 현저히 줄어든 이유를 초등학교에서의 약물 중독 교육덕분이라고 했다.

 

3. 정신보건 정책 수립이나 정신보건법 제정, 개정 등의 문제는 당연히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과 그들의 단체가 책임을 느끼고 정부와 함께 고민해야 하지만, 정신과 의사만으로 모든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학회는 관련 당사자들과 긴밀한 협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정신간호사, 정신의료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상담심리사와 그들의 집단과 협동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예술요법, 작업요법, 사회재활 관련 종사자의 기여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과 의사 자신의 수련 중 이들 비의사 치료사들의 역할과 협동치료의 이론과 실제를 배우고 경험해야 한다. 또한 환자 가족의 역할을 숙지하고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정신보건 향상을 위해 바람직한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정신사회재활 협회에서 경험한 바로는 임상에서나 이론적으로는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일단 각 직종의 ‘권익’에 관계된다고 생각되면 즉시 집단적 행동 속에 숨어서 좀처럼 초심의 순수한 협동정신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정신보건 전문요원의 교육을 어느 직종이 주도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면 뿔뿔이 흩어져 자기 학회의 결정에 의존하려 한다. 나는 항상 강조 했고, 현재도 변함없는 신념을 가지고 말한다.

‘우리에게 무엇이 이로운지를 생각하기보다 먼저 환자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생각해보자’라고.

 

4. 지금까지 생각만하고, 또 가끔 후배들에게 종용도 하면서 실현 못한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1960년 유석진 선생이 주동하여 사회 각계 인사들을 망라하여 창립되었다가 수년 뒤에 활동을 멈춘 대한정신건강협회와 같은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는 사업이다.

일본 동경대 정신과 전 주임교수 아키모토 하루오씨는 정신약물학이 전공인 분인데 정년퇴임 뒤에 일본 정신위생회의 회장이 되어 정신보건을 위해 진력했다. 이 회는 정책제안도 하고 정신보건 계몽 잡지도 발간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국제 정신보건 연맹, 세계정신사회재활협회의 학술대회에 참석하면서 늘 그런 구상을 머릿속에서 하고 있었다. 이동식 선생도 생전에 자주 정신건강협회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셨다. 나는 융연구원을 운영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니 더 다른 일을 할 수 없으나 정신과학회에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모든 것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시작한 뒤에 초심대로 유지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1960년의 정신건강협회가 왜 계속 유지되지 못했는지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5. 정신보건정책에 대한 대정부 교섭시의 ‘전략’이 무엇인가를 나에게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런 건 없다. 그때그때 가능한 조치를 취할 뿐이다. 건의문 발송, 개인적 접촉, 신문 방송 인터뷰 등.

김광일 회장 때 정신보건법의 국회 상정이 폐지된 데는 학회의 전방위 여론제기, 특히 재야단체의 환자인권침해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주효했다고 생각된다. 거기에 이호영 회장의 막후 접촉과 경고(학회 정신의학사편찬위원회(편) ‘학회를 돌아보며’ 참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

핵심적인 사람을 만나는 데는 한국에선 아직 인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똑같은 생각을 여러 종류의 단체가 한결같이 건의할 때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진실도 여기서 증명된다. 아무리 정당한 주장도 정신과 학회만 나서서 하면 집단 이기주의로 오해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책수립과 실천방향은 정부의 성향, 즉 군사독재정권인가, 민주정부인가, 좌파정권인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좌파정권이 환자의 인권이라든가 지역공동체 정신의료서비스에 관심도 있고 환자 복지에 긍정적이고, 군사정권은 당연히 환자에 대한 사회방위적 태도를 갖고 수용과 격리에 역점을 둔다. 어느 쪽이나 정신장애자에 대한 예산 지출은 항상 맨 끝 순서로 잡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먼저 ‘무엇이 환자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인가?’라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그 원칙에서 정책을 조명하고 우리의 의견을 솔직히 표명하여 상대를 설득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6.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 2인의 진찰 결과로 강제 입원을 결정하는 조항은 사실 정신과 학회가 초창기에 강력히 요구했던 사항이다.

‘환자의 인권’은 윤리학의 이론이 아니다. 하나의 현실이다. 나는 생각한다. 환자를 이롭게 하는 것이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이롭다’는 말에 대하여 여러 개인적으로 다른 의견이 제기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로 작금의 문제는 퇴원해도 좋은 환자들이 장기간 요양기관이나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핵심은 강제입원이 아니라 장기수용인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시실 밖에 사회복귀를 위한 재활시설이 매우 적고 법적으로도 퇴원 후 치료 및 재활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장기입원의 추세를 막을 도리가 없다.

 

7. 정신보건법은 흥미롭게도 수십 년을 내려오면서 아주 서서히 학회에서 주장하는 대로 바뀌고 있다. 다만 만성 환자의 재활과 퇴원 후 사회복귀 시설과 재활요법의 활성화와 제도적 보장이 커다란 맹점으로 남아있다.

주목할 것은 알코올 의존 환자에 대한 치료 및 재활의 제도적 뒷받침과 사회복귀기관의 확충이 매우 시급하다는 사실이다. 치료 재활되어야 할 사람들이 장기간 수용괴고 있거나 형무소를 오가며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1960년대에 이미 스위스에서는 잘 짜인 프로그램으로 알코올 의존 환자가 형무소가 아닌 병원과 재활 시설 그리고 사회 속에서 알코올 사회복지사의 지도를 받아 잘 관리되고 있었다.

 

8. 정부는 적이 아니다. 함께 의논해야할 상대다.

정부 나름의 혹은 국회 나름의 입장과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협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신보건 운동은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날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정부지원으로 정신보건 정책이 운용되고 민간의 호응이 없으면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

정신과 의사의 이름을 정신건강의학과 라고 바꾼 만큼 종래의 질병학적 입장을 넘어 넓은 의미의 정신건강, 즉 인격 성숙이라는 큰 과제를 놓고 배우고 실천하는 자세를 학회가 가져야 한다. 그러자면 학생 교육에서부터 전공의 교육에 이르기까지 지금보다 훨씬 깊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인간을 이해하는 정신의학교육에서 관점의 일대 전환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전글 보기 - 정신보건과 나 (3)

 

 

이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국 융 연구원장
서울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명예교수
전체기사 보기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