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취리히 C.G.융 연구소 수련에서 얻은 것, 독일계 정신의학의 이모저모

 

스트레이트 인턴을 거쳐(즉, 정신과 전공자로서 인턴을 함) 전공의 2년 끝 무렵에 유학을 갔으니 아직 정신과 의사로서 기능이 그리울 때였다. 그러나 연구소는 전적으로 독립된 분석심리학적 분석요법의 이론과 실습으로 일관되어 있어 임상에서 일할 기회는 약 3개월 방학기간 뿐이었다.

분석심리학 실습이란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보는 교육분석과 지도분석이다. 한국인이 한 사람도 없는 곳에서 겪는 1960년대 초의 스위스 생활에서 나는 동서문화의 갈등과 그 해소과정을 몸소 겪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나의 문화적 정체성을 발견하는 일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인으로서의 보편적 심성의 발견 과정이었다. 유럽에 대한 다소 일방적인 긍정적 투사를 거두고 동양 정신을 재발견하고 조국의 현실에 관한 열등감을 극복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실존 분석에 대한 환상은 메다르드 보스의 세미나를 두 학기 듣고, 빈스방거의 제자, 롤란드 쿤의 세미나를 한 학기 들은 뒤에는 바로 잡혔다. 그러나 빈스방거 집안이 100여년 경영해온 정신분열병환자의 정신치료, 환경치료를 주로 하던 유명한 Sanatorium Bellvue에 대한 기대는 결코 식지 않았고 분석가가 된 후(1967)에 소원대로 그곳에 들어가 실로 값진 경험을 하였다.

 

1966년 스위스 취리히 C.G.융 연구소 수료. 나의 큰 행운은 분석수련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준 장학회와 독지가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프란츠 리클린,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두 교육 분석가를 만나 융사상의 정통을 계승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운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함께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깨닫게 된다. 빈스방거병원에서의 좋은 선배, 동료들과의 만남, 환자와의 만남 모두 소중한 것이었고 지역 공동체 정신의료의 인간주의적 접근의 참된 정신에 접한 느낌이었다.

 

 

독일 정신의학의 묘미

 

역동정신의학의 수련을 받은 나에게 독일계 기술정신의학은 좀 평평한 평면같은 인상을 주었다. 정신질환을 심리사회문화적으로 이해하고 치료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기술에 충실하고 그것을 섣불리 심리학적으로 해석하지 않음으로써 지나치게 환자의 심리를 억측하지 않아 단백하다고 할까, 상식적으로 환자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탁월한 능력을 나타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신과 과장, 혹 병원장이 증례토의 끝에 내리는 레쥬메(요약)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결코 결론 부분의 진단명을 한 두 단어로 기술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무슨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어떤 병을 앓고 있는 갱년기의 부인’ 이런 식으로 길게 그 사람과 처지와 진단명을 함께 기술하는 것이다.

주립 정신병원에서는 작업요법, 여러 가지 고전적인 옥내 옥외 작업이 체계적으로 실시되고 있었고 알코올 중독자가 많은 스위스에서는 중독자의 입원, 퇴원후의 중간사, 통원시의 법적 보호조치, 알코올 사회복지사의 지도, 여러 가지 법적인 배려 등 재활 계획이 매우 철저하게 짜여져 있었다.

 

빈스방거병원에 가기 전에는 융기언들이 운영하는 작은 규모의 치료 공동체에서 일을 했다. 거기서 정신분열병의 정신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유명한 피에르츠 박사의 지도 분석을 받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치료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곳은 사나토리움 벨뷰다. 이에 관해서는 ‘심리요법병원의 현황과 문제점’이라는 논문에서 자세히 소개했다. 나는 거기서 치료자나 환자가 각자 사복을 입고 함께 식사하고 차 마시고 소풍가고 대화하는 것이 치료자에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러나 환자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래서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를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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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국 융 연구원장
서울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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