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뇌부자들[14화 part 1] “술이 나를 먹네요” 에피소드

 

A씨의 사연:

 

저는 30대 중반의 남자입니다. 학창시절에는 굉장히 내성적이고 낯도 많이 가리는, 비교적 모범적이고 조용한 성격에 남들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음주문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주당까지는 아니지만 남들과 맞춰서 마실 정도의 주량을 가진 저는 술자리에서는 분위기도 주도하고 술친구들도 생기면서 차츰 외향적인 성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으레 술자리를 만들고, 술을 마시면 분위기도 편해져서 금방 사람들과 어울리는 편이 되었습니다.

 

사진_pixabay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술을 마시다 보면 적당하게 절주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제 주량은 대략 소주로 1병 반에서 2병 정도인데, 분위기에 젖어 술을 마시다보면 어느 정도 마셨는지 깨닫지 못하고, 필름이 끊기는 경우도 잦아졌습니다. 사실 20대 초반에는 필름이 끊겨 전날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매우 당황스럽고 자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반복이 되다 보니 무뎌지고, 제가 필름 끊기고 하는 행동들이 특별히 다른 것 같지 않아서 크게 문제로 인식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같이 술을 마셨던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약간 행동이 업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크게 정도를 벗어나는 행동은 않는다고 해 안심했던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대 후반부터는 과음한 상태에서 행동의 문제가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단적인 예로 당시 여자친구에게 술 마시고 전화로 폭언을 하는 일이 수차례 있어서 결국 그 때문에 헤어졌고,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의 머리를 툭툭 치거나 하는 모습 등이 반복됐습니다. 특히 몇 달 전에 새로 옮긴 직장에서 술자리가 잦아지면서 음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수십만원 하는 고급양주를 제가 쏘는 경우도 있었고, 술을 마시다가 그날 처음 소개받은 동료 친구의 뺨을 툭툭 치고 막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두 저는 기억이 나질 않았구요. 다음날 핸드폰에서 결제내역을 확인하고는 후회하고, 또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사과하고 자책하는 일의 반복이었죠. 일주일에 1-2번 술자리를 갖는데, 두 번에 한번은 필름이 끊겨 이런 일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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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인간관계를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 술자리를 갖는 것인데 점점 제 생활에 악영향을 끼치고 좀먹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순간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먹는다는 생각이 들구요.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을 해보니 기본적으로 내향적인 제 성격 탓에 평소에 풀지 못한 스트레스나 눌려있던 감정들이 폭음을 하면서 술자리에서 과하게 표출되는 것이 아닐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술을 끊는 것 자체는 현재로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워낙에 20대 시절부터 술자리로 쌓인 인간관계가 많은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죠. 현재의 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 받아 보고 싶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선생님들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 입니다.

A님께서 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스스로도 걱정이 되어서 많은 고민을 해오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평소에 풀지 못하는 스트레스나 감정을 술에 취해 과한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이런 모습은 술 문제로 병원에 오는 분들뿐 아니라 저희 주위에서도 참 흔히 보게 되는 듯 합니다. 술이 중추신경의 기능을 억제하기 때문에, 이렇게 평소의 성격이라면 좀처럼 하지 않을 충동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참지 못하게 되고,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사진_pexels

 

이런 행동을 하고 나서 술이 깬 후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잦다고 하셨는데, 이 ‘블랙아웃blackout’은 주취 상태에서 나타나는 선행성 기억상실에 의한 증상입니다. 단기 기억이 저하되어서 5-10분 사이의 일을 떠올리지 못하게 되고, 술에서 깬 후에도 이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 ‘필름이 끊겼다’고 표현하는 것이죠. 나이가 들면서 음주 후에 이전보다 필름이 자주 끊긴다는 분들이 많은데, 이렇게 빈도가 잦아진다면 과음에 따른 뇌 기능의 손상이 점점 진행되고 있는 위험 신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 영구적인 손상, 즉 알코올성 치매로 이어질 수 있는데, 혹시 술을 안 마실 때도 기억력과 집중력의 저하, 감정 기복, 불면이 있다면 더욱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A님의 사연을 읽고 저희가 가장 우려되는 점은, 술을 마셔 필름이 끊기고 문제적 행동이 반복되는 지금의 상태를 본인이 잘 알고 걱정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술자리에서 음주량의 조절이 어려워 과음을 반복하고 있는 점입니다. 알코올 사용장애(알코올 의존, 남용이라는 진단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의 진단 기준에 여러 항목이 있는데, 그 중 핵심은 ‘음주 조절 능력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님께서 지금은 큰 무리 없이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고 건강에 문제가 없지만, 조절하지 못하는 음주를 계속하게 된다면 앞으로 건강이나 사회 직업적 영역에서의 문제를 점점 더 겪게 될 가능성이 높겠죠.

 

아래는 알코올 사용 장애를 간단하게 평가하는 선별 검사인데, 4항목 중 2개 이상에 해당하면 알코올 사용 장애를 의심할 수 있어 추가적인 평가가 필요합니다. 사연 내용을 바탕으로 볼 때 A님의 경우 알콜 문제에 관한 상담을 받아보실 필요가 있겠네요.

 

-술을 끊거나 줄여야겠다고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비난 받은 적이 있나요?

-술을 마신 뒤에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들거나 후회를 한 적이 있으세요?

-해장술을 하신 적도 있으신가요?

 

술 문제에 있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알콜 사용 장애는 유전적인 영향이 유달리 두드러져서, 알코올 환자의 가까운 친족에서 술 문제가 생길 위험이 일반인에 비해 3~4배 높다는 점입니다. 같은 양, 빈도로 술을 마시더라도 조절을 하지 못하고 중독에 취약한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 거죠. A님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음주 조절이 어려운 기질이신 것은 분명하기에 절주가 아닌 단주를 목표로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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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님이 단주를 결심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앞서 말한 음주의 사회적 기능, 즉 친구 관계나 직장에서의 사교 활동의 영향이 클 겁니다. 그런데 술자리를 통해서 지금까지 쌓아온 사회적 관계들이, 술을 끊는다고 한 순간에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도 술자리를 즐기시는 경우도 많이 있구요. 이전에는 술을 못 마시는 걸로 나무라거나, 마시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보는 잘못된 술 문화가 많았지만 점점 인식이 개선되고 있기도 하죠. 여러 곤란한 문제들이 점점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계속해서 술을 마셔야만 하는 건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보셨으면 좋겠네요.

 

단주를 결심했는데 혼자만의 노력으로 어렵다고 느낀다면, 정신과에서의 동기 강화 면담, 항갈망제 치료와 알코올 환자들의 모임(AA)등 여러 방법을 통해 도움을 받으실수 있습니다. 치료법들을 여기에 모두 자세히 소개드리지 못하지만, 많은 병의원에서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니 인근의 정신과에서 상담해보시길 권유 드려요.

 

물론 이런 도움들을 받더라도 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대부분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단주를 하게 되는데,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나는 술에 대한 조절능력이 남들보다 약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A님께서 지금까지 본인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오셨듯이, 심사 숙고해서 건강한 앞날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뇌부자들 드림.

 

[더 자세한 내용들을 팟캐스트로 들을수 있습니다]
팟빵: http://www.podbbang.com/ch/13552?e=22363913

아이폰 Podcast: https://itun.es/kr/XJaKib.c

팟티: https://m.podty.me/pod/SC1758/9068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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