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_픽사베이

 

음주운전의 위험과 위해는 이 지면에서 얘기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계시겠죠? 그런데 음주 자전거, 음주 보행자 교통사고도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딪힐 때 자기 방어 기전 없이 다치기 때문에 생명을 위협하는 손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죠. 많이 다친 환자도, 사고 가해자 입장이 되는 상대측에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과음하는 문화 자체가 큰 위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가 오던 여름밤, 새벽으로 넘어가는 조금은 한적한 시간이었습니다. 응급실 자동문 너머로 앰뷸런스에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젊은 남자 환자가 내려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구급대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왕복 6~7차선인 큰 도로에서 술에 취한 채 무단횡단을 하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얘기를 전해왔습니다. 환자 본인이 술을 마셨다고 했다는군요.

 

환자는 다행히 혼미한 정도로나마 의식이 있었지만 그 외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해 보였습니다. 머리 뒤쪽에서 나오는 다량의 출혈과 이마의 부종, 등과 엉덩이의 열상과 찰과상, 팔꿈치와 무릎에 보이는 심한 긁힌 상처가 처참했던 현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혼미하긴 하지만 의식이 있고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유지되는 것을 확인했으니 일단 아주 급한 불은 넘겼다고 봐야겠네요. 이제 지혈을 위한 응급처치와 머리, 가슴, 배, 목의 출혈과 골절 여부를 확인할 CT 검사가 우선인 상황입니다. 부지런히 머리 뒤쪽 출혈부위부터 압박해서 막아놓고 영상의학과에 연락해 환자를 출발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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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의학과에서 연락이 옵니다. 환자가 움직여 촬영을 진행할 수 없다고 하는군요. 술에 취한 외상환자를 볼 때마다 자주 겪는 문제입니다. 술 때문인지, 머리 외상 때문인지 모르니 검사를 지체할 수도 없습니다. 환자를 진정시킬 진정제를 투여하고 혹시 호흡저하가 올까 걱정되어 직접 CT실에 들어가 환자가 숨을 잘 쉬는지 지켜봅니다.

 

일분일초 아슬하게 불안하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CT 검사 결과가 전산에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CT, 가슴 CT, 복부 CT와 목 CT까지... 수백 장의 CT 결과를 보느라 눈이 뻑뻑하지만 여유 부릴 수는 없습니다. 바깥으로 보이지 않는 내부 장기 손상이 있으면 환자가 급격히 위험에 빠질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 가슴 CT 검사에서 약간의 폐좌상(폐조직에 멍이 든 상태)을 제외하고는 내부 장기에 큰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손상 기전과 외부 손상 정도를 봤을 때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하늘이 도왔다고 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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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상처와 온몸의 여러 상처들을 봉합하고 입원 준비를 하던 중 다른 교통사고 환자가 접수되었습니다.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 걸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물으니 답을 하기에 앞서 한숨을 푹 내쉽니다. 운전 중에 길 한복판에서 사람을 발견하고 피한다고 피했는데 사람을 친 것 같았고 자신은 가로수를 들이받았다고 합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온몸을 다쳤던 앞의 사고에 가해자 입장인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 사고를 수습하다 환자보다 늦게 도착한 듯 했습니다. 환자는 119 차량으로 실려 갔으니 어느 응급실로 갔을지는 모르고 오셨던 거겠죠. 그 한숨에 가해자로서의 고통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복잡한 처치를 받고 있는 환자의 모습을 보고 가해자 분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나 봅니다. 혹시 저분이시냐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냐고 물으시네요. 원래 의료인의 윤리 원칙으로는 치료 중인 환자의 상태를 보호자가 아닌 타인에게 알릴 수 없습니다. 특히 사고 당사자라면 더 그렇겠죠. 하지만 한숨과 괴로움 가득한 얼굴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과 죄책감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대답했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고... 그러자 다시 물으시네요. 혹시 평생 불구가 되시는 거냐고. 아직 결론 내긴 이르지만 그럴 것 같진 않으니 일단 마음의 짐을 내려두셔도 될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걱정과 두려움, 괴로움에 짓눌려 일그러진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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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이 단어는 보통 의도를 가지고 남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교통사고에서의 가해자는 그 의도성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특히 이렇게 술에 취해 무단횡단을 하던 상황에서의 사고라면 가해자 또한 정신적인 피해자가 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피해자는 신체적인 고통을, 가해자는 심리적인 고통을 어서 털고 일어나길 빌 뿐입니다.

 

 

* 응급실이야기와 응급실 사용 설명서가 모여 한 권의 책으로 태어났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226607
책이 나오기까지 사랑과 배려로 지켜봐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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