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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동료 응급의학과 선생님이 근무하는 중에 119 상황실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대량 객혈을 하면서 응급상황에 빠진 환자였는데요, 이럴 땐 순간의 판단이 생사를 가를 수 있습니다.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제가 겪은 일처럼 구성해 보았습니다. 같이 보실까요?

 

 

그날 저녁 응급실에는 유달리 환자가 많았습니다. 아니, 요즘 점차 늘어나는 김포 인구만큼이나 응급실 내원객도 늘어 유달리라 표현할 것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정신없는 가운데 울리던 전화벨 소리, 119 상황실이었습니다. 환자는 젊은 남성. 오래전 결핵을 앓고 치료를 다 받았지만 합병증으로 폐에 공동이 생겨 객혈을 경험한 적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기침을 하다 갑자기 상당량의 출혈이 발생해 119 구급대원의 도움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객혈... 무서운 합병증입니다. 결핵에 의해 파괴된 폐조직이 공동이라는 구멍을 만들면 노출된 모세 기관지 혈관이 작은 기침에도 쉽게 찢어져 출혈이 발생하게 됩니다. 폐조직에서 막 산소를 만난 밝은 선홍색 피가 기침할 때마다 울컥울컥 나오게 되죠. 기침이 계속될 땐 차라리 환자가 버텨주는 상황입니다. 이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순식간에 저산소증으로 의식을 잃게 되고, 그럼 기침 반응조차 없어지면서 피를 뱉어내지 못해 사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응급의학과 의사라면 하얀 응급실 바닥에 흩뿌려진 새빨간 객혈의 흔적을 보는 순간, 등에 한줄기 식은땀이 흐르는 듯 한 오싹함을 느낍니다.

 

문제는 지혈이 쉽지 않다는 것이겠죠.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쪽 기관지 중 한쪽으로 호흡이 유지될 수 있도록 두 개의 통로를 가진 특수 기관 삽입술을 해야 합니다. 다음 치료 순서는 출혈이 발생한 한쪽 폐 일부를 응급 수술로 묶어 지혈한다고 배웠습니다. 문제는 수술방까지 무사히 환자를 살려서 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죠. 다행히 요즘은 무조건 수술을 하진 않습니다. 혈관 내 시술이 발달해 다리에서 혈관을 타고 들어가 기관지 동맥을 막아 출혈을 막는 기관지 동맥 색전술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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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험한 환자가 온다는 연락이 오면 어떤 의사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 병원은 특수 기관삽관 준비도 안되어 있고 폐 수술이나 시술도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상황입니다. 당연히 대학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다량의 객혈을 한 환자를 119 구급대원의 손에만 맞긴 채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순 없었습니다. 일단 기도확보 등의 응급조치라도 하고 봐야겠단 생각에 환자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곧 환자가 도착했고 다시 한번 자세히 확인하니 출혈량이 상황실에서 들은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 집에서 두 번 기침하면서 새빨간 피가 나왔고 그 양이 우유팩 세네 개는 족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19 구급차 이송 중에도 한차례 피 가래를 쏟아냈다고 하네요. 낮아진 혈압을 유지시키기 위해 긴급하게 양쪽 팔에 굵은 혈관을 잡으면서 지혈제 섞은 수액과 응급수혈 치료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응급실 의료진들이 맹수에 놀란 토끼와 사슴처럼 정신없이 뛰는 가운데 환자는 그리 놀란 기색이 없습니다. 이전에도 객혈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걸까요, 다량의 출혈로 기운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반쯤 포기한 걸까요? 하지만 응급실 의료진에게는 포기란 없습니다. 완전히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죠.

 

다행히 환자의 기관지에서 나오던 출혈은 잠시 멈춘 모양입니다. 산소마스크만으로 산소포화도 수치가 유지되어 기관삽관술을 하진 않아도 되겠습니다. 잠시나마 환자의 생명징후를 잡는 데 성공한 것 같군요. 이제 응급 흉부외과 수술이나 혈관 내 색전술 시술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보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잡은 생명징후인 만큼 1분 1초의 시간이 아까운 상황입니다.

 

사진_작가

 

그때 퍼뜩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몇 달 전 영상의학과 과장님이 월례 과장 회의에서 하신 말씀이 있었거든요. 본인이 혈관조영실에서 각종 혈관 시술을 할 수 있으니 입원환자에게 필요한 경우 도움드리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땐 응급실에서 의뢰할 일이 흔치 않겠다 싶어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던 거죠. 마침 그때 그 얘기가 떠올라 영상의학과 과장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상황설명을 하고 응급으로 혈관색전술 시술이 가능한지 묻자 흔쾌히 맡아주시겠다는 겁니다.

 

휴... 한시름 놨습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지혈된 환자를 응급차량에 태워 이송하려 하면 그것도 꽤 불안한 일인데 말이죠. 밤늦은 시간이라 기대하지 못했던 가운데 나온 반가운 소식입니다. 직접 입원환자를 보지 않기 때문에 어지간한 영상의학과 과장님들은 퇴근 후 병원에 다시 나오는 경우가 드뭅니다. 응급하지 않은 대부분의 시술은 낮 근무 시간으로 미뤄지기 일쑤죠. 그래서 더 기대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기뻤습니다. 그날 밤늦도록 이어진 기관지 동맥 색전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다량의 출혈로 혈색이 하얘진 환자는 알듯 말듯한 미소를 띤 채 중환자실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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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근무를 마친 다음날 아침, 환자의 안위가 궁금해 중환자실에 방문했습니다. 혈관 색전술이 잘 되어서 그런지 다행히 밤새 객혈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혈만 몇 팩 더 받으면서 지켜보면 될 것 같다고 하네요. 환자도 어제와 달리 밝은 웃음을 띄며 감사인사로 저를 맞아주셨습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힘들지만 왠지 기분은 뿌듯한, 좋은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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