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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응급실로 출근하니 책상에 문서가 몇 장 놓여있습니다.

 

요즘은 개인 보험을 많이 들기 때문에 응급실에서도 문서 일이 생기는 편인데 그 중 하나가 환자가 이전에 진료 받았던 진료확인서를 요청하는 서류발급 요청서입니다. 환자 번호를 입력하고 차트를 확인하다보니, 한 환자의 차트에 눈길이 멈춰 섰습니다.

 

작년 가을, 쌀쌀한 날씨에 감기환자가 늘어갈 무렵, 한 20대 후반의 젊은 여성 환자가 속이 불편하다며 응급실로 오셨습니다. 3일 전부터 감기증상이 있었는데 감기로 끝나지 않고 구역, 구토, 복통이 발생해 개인 의원에서 위염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했던 모양입니다. 헌데 증상이 계속되고 약간 숨찬 느낌도 있다며 응급실까지 오신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혈압도 괜찮고 열도 없고, 뭐 특이한 건 없네.' 하면서 증상만 조절할까 생각했었습니다.

 

보통 20대의 건강한 사람이 이런 증상으로 오면 감기, 위염, 간염 등 심각하지 않은 질환을 고려해 간단한 피검사를 시행하고 증상 조절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날의 저도 그랬지만 단 하나, 환자가 숨이 찬 느낌이 있다는 말이 살짝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 그럼 기본적인 피검사 하면서 심전도를 하나 추가해서 확인하자.'

'심전도 괜찮으면 간수치 확인해보고 이상 없으면 퇴원하면 되겠네.'

 

이런 계획을 머릿속에 세워놓고 수액과 피검사를 처방하기로 했습니다. 잠시 후, 응급구조사 선생님이 가져온 심전도 결과지는 별다른 소견 없이 약간 빠른 맥박만 확인되고 있었습니다.

 

'110회면... 환자는 힘들어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맥박은 꽤 빠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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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고민하다 심근경색 등 중한 질환을 확인하기 위한 검사인 심장근육 효소수치 검사를 추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솔직히 검사 비용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은 여자환자가 약간 숨찬 정도인데 뭐가 있으랴,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2시간여 뒤 나온 피검사 결과가 이상했습니다. 심근효소 수치가 엄청나게 높아져 있었던 것입니다. 흡사 심근경색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수치가 확인되었습니다. 환자는 가슴 아프단 얘기도 없었고, 환자 증상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된 검사 수치가 맞는지 검사실에 물어보았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두 번이나 확인한 결과라는 겁니다. 그제야 전 이 환자가 그냥 단순 감기가 아니라 심근염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심근염, 심장 근육에 염증이 발생하는 질환.

 

여러 가지 감기 바이러스가 목으로 오면 목감기, 코로 오면 코감기지만 이 녀석들이 뇌, 척수 주위로 가면 뇌염, 뇌수막염이 되기도 하고 심장 근육으로 가면 심근염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으면 진단이 쉽지 않고, 진단을 놓치게 되면 치명적인 게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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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의 경우에도 심근염으로 위험에 빠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수련 중이던 때의 경험입니다. 유치원생 여자아이가 감기 증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이가 숨이 차고 힘들다고 해 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내원하던 중, 차에서 경련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이상해요” 라며 데려온 아빠의 손에 안긴 아이의 심장은 이미 멈춘 상태였습니다.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멈춘 심장을 되돌릴 순 없었습니다. 그날은 하루 종일, 한 순간에 아이를 잃은 아빠의 울음소리가 떠올라 우울함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이 날, 응급실을 방문한 젊은 여성 환자는 그 정도 상황이 되기 전에 진단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심장 근육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춰버릴 위험이 있어 중환자실에서 심장내과 전문의가 집중 관찰해야 하는 상황. 하필 그 날, 병원 내 심장내과 선생님이 학회를 간 날이라 대학병원에 의뢰를 하고 환자분께 설명을 했습니다.

 

"환자분은 단순한 감기인줄 알고 오셨겠지만 검사 결과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심근염이라는 질환이 온 것 같은데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어서 심장 전문의가 상주하고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겨드릴 겁니다. 이동하는 동안 옆에 응급구조사 선생님이 같이 타고 가면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지 봐 드리겠습니다."

 

이후 동행했던 응급구조사로부터 전원을 가는 동안 별 탈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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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를 확인해보니 마침 그날 함께 진료 봤던 간호사, 구조사가 함께 근무 중이군요. 얘기를 나눠보니 다들 흔치 않은 특이한 경우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진료회송서에 의하면 전원 간 병원에서 확인한 심장 초음파에서 상당한 양의 심낭삼출액(심장과 심낭 사이 공간에 발생한 체액이나 혈액)이 확인되어 응급 심낭천자술(심장 주위에 고인 액체를 빼내는 시술)을 시행했다고 하네요. 이후 바이러스성 심근염, 심낭염 진단 하 입원치료를 잘 마쳤다고 적혀있었습니다.

 

환자도 저도 정말 다행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별거 있겠냐는 생각에 빠져 오판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반 년 넘게 지난 얘기지만 환자분이 의뢰한 진료확인서를 쓰면서 '다행히 잘 지내고 계신가 보구나. 그래서 이렇게 문서 신청도 하셨구나'하고 혼자 뿌듯한 기분에 빠져봅니다.

 

 

이 글이 공개된 뒤, 저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께서 제 글을 읽고 한 커뮤니티를 통해 감사의 편지를 공개해 주셨습니다. 글을 읽고 행복감에 젖어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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