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환자는 서로를 믿을 수 있을까?

 

 

(기사원문)

 

사망선고를 받은 80대 환자가 영안실에 안치되기 직전 살아나는 일이 있었다. 심장이 멈춰 15분 동안 심폐소생술을 했으며 차도가 없어 당직의사가 사망선고를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영안실로 옮기려는 순간 장례식장 직원이 숨을 쉬고 있는 환자를 발견했다. 다시 살아난 것이다. 단순히 살아난 것이 아니라, 치매증상도 완화되어 자녀를 알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심정지 환자가 발견되면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한다. 이때 필요한 의료인은 최소 5명이다. 의사 한명은 기도 삽관, 전기 충격 등 술기를 하거나 약물 투입을 지시한다. 간호사 한명은 약물 투입을 실행하며, 다른 간호사가 모든 과정을 기록한다. 여기에 가슴압박을 하는 인원이 추가로 필요하다. 가슴압박은 혼자서 한다면 힘들어서 10분도 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최소 2명 이상이 교대로 가슴압박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해도 호흡 및 반사 반응이 없고 맥박이 뛰지 않는다면, 담당 의사는 더 이상의 소생술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중단시키고 사망 선고를 하게 된다.

 

심폐소생술을 몇 분 해야만 한다는 시간 기준은 없다. 심폐소생술 중단은 환자가 앓고 있던 병의 중증도와 예후, 환자의 죽음에 대한 보호자의 판단, 소생 후 삶이 환자가 정말 원하는 삶인지 여부를 모두 고려한다. 따라서 의학적 판단 뿐 아니라 윤리적 판단을 같이 하게 된다. 여기서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말은, 담당 의사의 가치관이 환자의 사망 시점을 결정하는데 기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진_픽사베이

 

말기 암 환자가 심폐소생술을 해서 오늘은 살아날 가능성이 있어도, 수일 내로 다시 심장이 멈출 것이 예상된다고 하자. 어떤 의사는 가족과 상의하여 소생술을 중단하고 바로 사망선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의사는 환자가 며칠 더 살아있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소생술을 중단하지 않고 환자를 살릴 수도 있다. 이렇듯, 의사의 윤리적 판단이 사망선고 시점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가 환자가 진짜 죽는 시점인지 알 수 없다. 물론 환자가 언제 죽을지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현대의학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사망선고를 받은 환자가 살아나는 일이 생긴다.

 

이런 이유로 의료 윤리의 중요성은 점점 강조되고 있으며, 의대/의학전문대학원 커리큘럼에도 포함되어 있다. 윤리적 고민은 사망 선고 뿐 아니라 환자에게 어떤 치료를 적용할 것인지, 병원에 얼마나 자주 오게 할 것인지 등 거의 모든 의학적 선택 상황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이런 교육을 받더라도, 의사가 환자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적절한 선택지가 만들어질 수 조차 없다. 환자가 수술과 약물치료 중 어떤 치료를 선호하는지, 치료로 인해 장애가 남을 수 있다면 환자와 보호자는 어느 정도까지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지, 심폐소생술 보다는 고통을 최소화 하며 가족들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선호하는지 등은 의사와 환자가 많은 대화를 나눠야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의사가 좋은 선택지를 만들어내고, 환자와 보호자가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다.

 

늘 그렇듯이 현실은 다르다. 병원에서 의사와 충분한 대화를 하는 것은 어렵기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의료 기술이 세계적일지라도, 의료에 대한 환자의 만족도는 낮으며, 의사에 대한 신뢰도는 더 낮은 걸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람도 믿기 힘든 세상인데, 가끔 보는, 그것도 그렇게 친절하지도 않은 의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OECD health data 2016’을 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 년에 14.9회 의사를 만난다. 이는 OECD 평균인 6.9회의 두 배를 조금 넘는 수치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환자는 의사를 두 배 만나고, 의사는 두 배의 환자를 진료하고, 정부는 두 배의 의료비 지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국민들이 병원을 자주 가서 혹은 의사들이 과잉진료를 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볼 때 마다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길에 있는 돌을 주워오면 돈으로 바꿔주겠다는 법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돌을 주울 것이다. 길에 있는 쓰레기를 주워오면 돈을 주겠다고 하면, 쓰레기를 주울 것이다.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이 돌을 너무 많이 줍는다고 비판할 수 없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건복지부가 올해 5월 11일에 배포한 보도 자료에 따르면, 환자와 의료인의 신뢰를 강화하기 위해서 모든 의료인은 명찰을 착용해야 한다고 한다. 환자와 의료인이 신뢰를 하지 못하는 것이, 환자가 의료인의 이름과 직위를 모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의료인이 이름과 직위를 숨기기 때문에 신뢰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인가. 의사와 환자가 서로를 신뢰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는 의료 정책 때문이 아니라 환자와 의료진에게 넘기고 있는 정부의 태도가 아쉽다.

 

정신보건법 개정 역시 마찬가지다. 강제입원이 가지고 있는 허점과, 그 허점을 이용한 일부 의사의 행태는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는 결함이 있는 강제입원을 개정하지 말고, 법원이 환자의 입원 치료를 명령하는 ‘사법입원’의 도입을 주장해왔다. 법원이 환자에게 입원 치료를 명령한다면, 환자도 의사를 더 신뢰할 수 있고 의사도 치료에 더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문가 집단의 주장과 2017년 3월, WHO의 ‘강제입원 폐지 권고’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는 현재 강제입원 체제를 보완하는 선택을 했다. 그 배경에는 사법입원을 시행 한다면, 사법부와 보건복지부가 연간 10만 건의 강제입원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강제입원에 대해 이미 의사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도 이를 다시 의사에게 맡기는 것은 정책적 편의를 위해, 의사와 환자의 신뢰관계를 더 망가뜨리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정책 이외에도, 최근 환자의 권리를 찾는 것에 관한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많은 정책 중 일부는 환자가 의사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심지어 일부는 신뢰관계에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환자의 권리는 의사와 환자가 서로 믿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생하는 것이지, 척박한 환경에서 정책이 심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의료 환경을 바꾸는 정책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정책이 필요한 게 아닐까.

 

80대 노인이 다시 살아나서 치매 증상이 좋아졌다. 기적이다. 종종 이렇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굳게 신뢰하는 것은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기적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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