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거나 괴롭힐 때 격양된 기분이나 감정의 표현으로 ‘살인 충동이 든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하고도 금방 일상의 제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특정 인물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심하게 듭니다. 얼굴만 마주해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물론, 평범하게 공부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세수를 하던 와중에도 돌연 ‘그 인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달 전엔가는 다 같이 앉아 밥을 먹는 와중에 실제로 행동을 할 뻔 했습니다. 실제 상황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충동이 진짜 심하게 들어서 행동을 하려고 했을 때 마지막으로 이성이 작동했는지, 냅다 도망치듯 나왔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생생하게 긴장된 기분이나 오싹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문제는 그 오싹함이 두려운 느낌이 아니라 짜릿함과 비슷한 느낌이었기에, 종종 이 사건을 떠올리며 아쉬운 기분마저 느끼곤 합니다.

현재 상황은 저 특정 인물에게 향하는 이러한 욕구가 너무 강해져서 일상생활의 흐름을 종종 깰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일이든 공부든 흐름을 깨는 것은 다반사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정말 시도 때도 없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합니다.아직까지 직접적인 문제가 생긴 적은 없지만, 병원에 가 보는 게 좋을까요? 

이 특정 인물을 20년 동안 싫어했지만 요즘처럼 심하진 않았어요.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짜증은 나도 보통은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근 일 년 사이에 갑자기 심하게 충동이 일고 있습니다. 시간 좀 지나면 사그라들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금껏 버텼는데, 이제는 조절이 안 될 지경이에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 충동이 사라지길 빌고만 있어요.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보내 주신 사연 잘 읽었습니다. 누군가를 20년 동안이나 미워하셨는데, 일 년 사이에 미움을 넘어 살인하고 싶은 충동이 불쑥 들어 일상을 방해하는 수준에 이르셨습니다.

사연자님의 글을 읽으면 질문하고 싶은 내용이 많이 떠오릅니다. 무엇보다 사연자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 누군가를 그토록 싫어하는 마음을 20년 동안 참아오면서,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는지, 표현했다면 어떤 수준까지 표현했는지, 상대방과 의사소통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요. 또한 사연자님이 평소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타인에게 불만이 생기면 이를 어떻게 다뤄 왔는지도 궁금합니다. 궁금증이 많이 드는 이유는 사연자님이 어떤 사람인지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해치고 싶은 충동은 상세히 적혀 있지만, 정작 사연자님에 대한 정보는 많이 부족합니다. 사연자님이 어떤 사람인지 피부로 와닿는 특성, 성향들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상세하게 도움이 될 답변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부탁드리고, 현재 경험하는 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살인 충동을 어떻게 건강하게 다룰지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일상을 방해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침습적 사고’라고 합니다. 자동적이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오르는 사고이며, 사고를 억제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더 사고의 빈도를 증가시킵니다. 죽이고 싶다는 단어를 외면서 업무를 하는 수준이라고 하셨는데요. 일반적으로는 원치 않는 사고라면 이를 억제하려는 시도를 하고, 이러한 노력들이 효과가 없을 때, 불안을 증가시킵니다. 사고가 통제되지 않기에 불안감이 증폭되는 것이죠. 하지만 사연자님의 경우에는 원치 않는 생각이 아니라, 원하는 생각이라는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그래서 여쭤 보고 싶습니다.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멈추기를 바라는 욕구는 있으신지요. 죽이고 싶은 욕구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다른 중요한 욕구들이 배제되고 있진 않은지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그 살인 욕구 이전에, 20년간 상대에게 간절히 바랐던 것은 무엇인가요? 사연자님께 어떻게 대하기를, 어떻게 말하거나 말하지 않기를 바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 욕구가 20년 동안 좌절되었기 때문에, 좌절에서 오는 분노가 어마어마하게 크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노가 극심해지면 자신을 향하거나 타인을 향하게 됩니다. 어쩌면 20년 동안 분노를 누르면서 자신을 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내면화될 때 많은 경우 우울감으로 오기도 합니다.

현재는 사연자님의 섬세한 감정들이 마비된 채 특정 사고만을 반복하고 이에 매몰되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일상에 침투하는 사고 때문에 불편함이 많이 증가했다고 느끼신다면, 정신과 전문의와의 면담을 일차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면담을 통해 현재 살인 충동이 일상 기능에 어떠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는 있습니다. 일에 대한 집중력이 저하되거나 대인관계에도 영향이 있는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어느 정도 만족/불만족하는지 등 전반적인 사연자님의 삶을 점검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면 좋겠습니다. 살인 충동이나 사고에 대해서는 약물치료로 조절하고, 더 나아가서는 심리상담을 병행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현재 가족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아, 부모님께 당장 털어놓기는 어려운 상황이신 것 같습니다. 20년간 누적된 증오가 얼마나 깊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서 혹시 그동안 허심탄회하게 나눌 대상이 없으셨다면, 혼자서 그 감정을 처리하기 얼마나 버거우셨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제는 혼자서 처리하는 데 한계가 닥쳐 온 것입니다. 그럴 때 감정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제거하는 것 자체를 문제 해결이라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증오하는 대상을 살해한다고 해서 마음이 씻은 듯이 평화로워지고 미움이 사라질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점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지금 겪는 고통이 살인으로써 해결될 것 같다는 예측이 달콤하고 또 매력적으로 느껴지면 계속 그 생각에만 집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으로 해결되는 일보다 책임지고 감수해야 하는 일들이 더욱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충동을 느끼고 자각하는 것은 아주 잘하셨습니다. 이 충동을 혼자만의 세계에서 상상하며 계속 키워 가는 것보다는 현실 세계에서 도움을 청하셨으면 합니다. 

글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수십 년간 상대방을 미워하는 데 삶의 에너지를 많이 써 오며 잃은 것들이 많으셨을 듯합니다. 분노뿐 아니라 억울함, 외로움 등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것들을 누군가와 나누셨으면 합니다. 현재 공격성의 수준이 나를 해하거나 타인을 해할 가능성이 있다면 반드시 보호가 필요합니다.

마음속에는 나의 의지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때때로 생깁니다. 도움을 기꺼이 구하셨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손해를 줄이기 위해 사연자님 마음속에 미워하는 상대방을 위한 공간을 더는 내주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를 향한 과도한 에너지를 줄이고, 사연자님의 마음에 집중하고 차분히 돌아보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줄 수 있도록, 도움을 꼭 청하시기 바랍니다. 사연자님의 일상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성찬 원장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인하대학교병원 전공의
(전)수도군단 의무실장.아산정신병원.다사랑중앙병원 진료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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