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중학생 때부터 만성 우울감과 공허함을 느껴 왔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살아 있는 것 자체에 부질없음을 느꼈던 것 같아요.

직접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초반까지 아빠의 외도와 부부싸움(폭력) 등으로 집안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았고, 정서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저는 일찍이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그 때 우울증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또한 부모님의 관계를 보면서 나는 커서 저런 관계가 아닌,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소울 메이트를 만나서 안식처를 찾고 싶다.’는 것이 마치 인생 목표가 되어 버린 것 같았어요.

하지만 대학생 때부터 그리고 직장인이 된 지금도 연애를 하면 상대는 변함없는 모습인데 저만 혼자 속으로 상대가 변할 거 같은 두려움과 함께 ‘이 사람은 내가 나이가 들어도 나를 정말 사랑해 줄까? 떠나겠지?’와 같은 불안감이 심하게 듭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쿨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 또한 커서 혼자 불안해하다가 상대의 마음이 가장 커졌을 즈음 항상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식의 연애를 반복해 왔습니다.

올해 서른 살이 되고, 최근에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서로를 많이 아껴 주고 있고 연애 초반인 만큼 많이 행복해요. 하지만 다시 제 마음속에서는 근거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와 너무 힘이 듭니다. 특히 서른 살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직 많이 젊다는 걸 머리로는 인지하는데도, ‘남자친구가 나보다 어린 여자가 좋다고 떠나면 어떡하지?’라던가 ‘몇 년 후,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차이면 어떡하지?’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지금의 행복한 순간조차 만끽하지 못합니다.

또한 원래 있던 만성 우울증이 최근 들어 더 심해져서 ‘지금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다 부질없고 지겨워지겠지?’, ‘어차피 다 늙어서 죽고 소용없어지는데 지금 죽는 게 사실은 제일 행복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제일 행복한 순간에서조차 ‘아, 오늘이야말로 시간이 멈춘 채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살 사고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만성적인 공허함과 연애할 때마다 불안감이 찾아와서 지금은 정신과 상담을 받고 항우울제를 복용 중이지만, 이런 생각이 계속해서 드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요? 행복한 순간에도 항상 공허함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는 제 자신이 너무 싫습니다. 도와주세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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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의 사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만성적인 우울감과 인생의 공허함,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불쑥불쑥 찾아와 마음이 힘드신 상황이군요.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어렵고, 언젠가는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신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서두에서 말씀해 주셨다시피, 어린 시절 부모님의 잦은 불화와 폭력, 아버지의 바람 등은 사연자님의 내면에 깊은 불안감과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불안정한 상(像)을 각인시켰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부모님의 관계를 통해 남녀 관계에 대한 도식이나 신념과 같은 것을 내면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바람과 폭력, 부모님 간의 불화는 사연자님의 마음속에 깊은 불안감을 드리웠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부모님과 사연자님의 관계, 부모님 두 분의 관계가 나의 인간관계에 있어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어릴 적 나는,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또 부모님 사이의 관계를 보며 많은 감정들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 두 분의 관계나 모습에서 긍정적인 느낌이나 안정감을 획득하지 못하고, 수치심과 죄책감, 절망감과 두려움, 소심함과 불안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너무 많이 경험하거나 만성적으로 시달리게 될 경우, 이것이 마치 나의 진짜 감정처럼 둔갑하기도 하는 것이죠. 

 

유년기에 경험했던 정신적 상처는 그가 성인이 됐을 때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짐처럼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거나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과거의 결핍을 채우고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성인이 된 이후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작동되곤 합니다. 혹은 비합리적인 사고나 왜곡된 믿음의 굴레가 자동적으로 반복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부모님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나는 어른이 되면 저런 관계는 맺지 말아야지.’,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소울 메이트를 만나야지.’, ‘영원한 내 편, 나의 안식처를 찾고 싶다.’는 소망이 사연자님의 말씀처럼 마치 ‘인생의 목표’가 되신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렬한 욕구와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이별이나 연인의 배신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면에 함께 자리하기 때문에 정서적인 안정감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죠. 

사실 관계에 대한 불안감이나 불신이 크지 않더라도, 우리는 연인 관계에서 누구든 이별을 경험하거나 타의에 의해 배신당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 사연자님의 부모님처럼 현실적으로 그런 관계를 경험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요. 만약 이별이나 배신을 당했을 때 그것이 나 혹은 우리 관계에서만 있을 수 있는 ‘특수성’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보편성’으로 받아들였을 때 상처를 좀 더 잘 보듬고 극복하며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 후에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역시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해 주고, 내게 안식처가 될 만한 사람은 없어.’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의 경험을 통해 그것을 마치 사실인 양 확대해석 하고 왜곡되거나 부정적인 신념이 강화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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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자님께는 다음의 네 가지 사항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어릴 적 부모님의 불화나 아버지의 바람 등 힘들었던 과거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사연자님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향해 위로해 주고, 따뜻하게 안아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란, 우리의 정신 속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내 안에 상처받고 웅크리고 있는 나를 뜻합니다. 우리는 각 발달단계에서 충족되지 못하거나 감정적으로 힘든 일상이 반복되면서 어른이 될 경우, 미처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내면 아이’에 의해 삶이 지배당하고,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곪은 상처의 고름을 짜낸 후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마음이 한없이 아팠던 어린 사연자님의 시선으로 돌아가 그 시절 결핍되고 상처받았던 사연자님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따뜻한 위로를 스스로 건네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연자님과 사연자님의 부모님은 성격도, 특성도, 히스토리도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 분의 부모님께서 겪었던 분열과 갈등은 두 분의 것이므로, 사연자님께서 남녀 관계에서 ‘두 분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과도한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만약 사연자님께서 연인과 이별하거나 혹시라도 배신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은 부모님이 아닌, 사연자님의 히스토리입니다. 부모님의 관계에 자신의 관계를 투사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은, 나와 부모님이 ‘분리된 객체’라는 인식을 어렵게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관계에서 오는 상처나 아픔은 불필요하게 더욱 배가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세상에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되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과 대면합니다. 하물며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 할지라도 상대의 마음을 다 안다거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믿음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연약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상처받기 쉽습니다. 따라서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지 못하거나 내 마음을 잘 모른다 해서, 또 사소한 오해와 갈등이 생긴다 해서 ‘그 사람이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섣부른 판단이나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찾을 수 없기에 인생의 목표가 좌절됐다고 평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네 번째는 지금 사연자님께서 느끼시는 만성적 공허감이나 불안감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과거 부모님이나 가정환경의 영향이 아직도 사연자님의 삶이나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연자님께서 삶을 대하는 태도나 타인에 대한 믿음, 연인과의 관계 패턴이나 양상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특히, 과거 혹은 현재에도 진행 중인 사연자님의 연인과의 관계나 상호작용에 대해 냉철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상대의 마음이 가장 커졌을 즈음에 항상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식의 연애를 반복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상대에게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하는 방어기제로서 회피를 선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방어기제를 자꾸 작동시키는 것은,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의 상황을 암울할 것이라고 속단하여 지금-여기에서 경험하는 사연자님의 온전한 관계와 내적 경험을 밀어내거나 차단하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혹시나 모를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행동 패턴을 반복하는 것은 연인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온전히 서로를 받아들이는 경험을 방해하고 맙니다. 어떤 만남이나 관계도 평온하기만 하거나 항상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것은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사랑하는 마음과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서로의 불완전함과 결핍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갈등이 생기면 시각차를 좁히기 위해 서로의 입장과 의견을 조율하면서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성숙해지는 것이죠.

 

어쩌면 그 사람도 언젠가는 떠나고 이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허무함과 상처만은 아닐 것입니다. 마음껏 사랑하고, 표현하고, 사랑받고 마음을 나누었던 경험과 소중한 기억들이 우리에게 남습니다. 또 그것이 우리 내면을 성장시킵니다. 남겨진 슬픔과 외로움을 잘 다독이면서 소중한 기억을 때때로 꺼내 보면서, 다시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거나 살아갈 동력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 부모님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가 현재 사연자님께 주어진 생을 기꺼이 경험하거나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데 방해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 이러한 자각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조금씩 흘려보낼 수 있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사연자님의 것이 아닌, 부모님 두 분의 관계였음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현재 사연자님과 연인과의 관계와는 자꾸 분리해 보는 연습을 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관계에서 비롯되는 행복감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정과 상황들을 겪어 나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며, 비록 서툴더라도 이를 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을 때 지금 느끼시는 공허함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점차 잦아들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 만나시는 분과 마음껏 행복하시고, 그 어떤 감정도 회피하지 마시고, 용감하게 직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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