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는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각에 비슷한 풍경을 마주하며 눈을 뜹니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어제 본 풍경을 눈에 담으며 똑같은 경로를 거쳐 직장으로 향합니다. 회사에 출근해서 맞이하는 장면은 어제와 비슷하고, 내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업무를 마치면 출근한 경로와 방향만 반대되는 길 건너편 도로 위에서 액셀과 브레이크를 반복해서 밟으며 익숙한 창밖 풍경에 잠시 시선을 두겠지만, 특별히 주의를 끌거나 관심을 기울일 만한 요소는 없습니다. 변화된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미국의 철학자이자,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권태와 시간의 경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자극은 경험에서 쾌락을 얻는 데 필수 요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토론토대학교의 심리학자 대니얼 벌린Daniel Berlyne은 인간과 동물의 동기에 관한 연구를 해 왔습니다. 복잡성이 각성과 동기 수준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실시한 벌린의 연구에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쥐들 역시 시각적으로 복잡한 장면을 선호하는 현상이 관찰되었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자극 수준이 낮은 권태로운 상황보다 높은 쪽을 택한 것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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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권태란 무엇일까요? 지루한 정서 상태일까요? 아니면 낮은 각성 수준일까요? 실제로 어떤 연구자들은 권태를 ‘낮은 각성 상태’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연구자들이 권태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지시해서 권태 상태를 유발하자, 생리 각성 수준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벌린을 비롯한 최근의 연구자들이 실시한 실험에서는 권태가 때로는 높은 각성 수준과 스트레스 상태까지 유발할 수도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월터루대학교의 인지신경과학자 제임스 댄커트James Danckert가 실시한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심박수와 피부전도를 측정하는 장치를 연결한 다음 몇 편의 비디오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슬픔을 유도하도록 설계된 비디오와 권태를 유도하도록 설계된 비디오 장면을 본 참가자들의 결과가 각기 다르게 나왔습니다. 슬픔에 비해 권태를 유도한 비디오 장면을 본 참가자들의 심박수가 더 높게, 피부전도는 더 낮게 나타난 것입니다. 피부전도가 낮아진 정도는 참가자의 권태로움이 각성 수준을 떨어뜨린 정도를 의미한다고 해석되었는데요, 추가 연구에서는 지루한 비디오를 3분만 봐도 타액의 코티솔 수준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만성적으로 높은 코티솔 수준은 심장질환이나 당뇨 같은 각종 스트레스 관련 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의 마크 로젠츠바이크는Mark Rosenzweig풍부한 경험을 하고, 풍요로운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아동들의 발달과정에서 뇌의 구조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연구를 통해 풍요로운 환경에 사는 쥐들의 수행 능력이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뇌세포 간의 시냅스 연결이 풍부하게 발달해서 신피질이 더 두꺼운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신경과학의 현대적 관점을 형성하는 데 초석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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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환경이나 경험에 잠깐만 노출되어도 뇌와 신체의 화학반응이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고, 풍부한 경험이나 풍요로운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뇌의 구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실험 결과는,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변함없는 일상의 공간과 장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많은 연구들에서 지루한 환경이 스트레스와 충동성을 높이고, 긍정적 정서를 감소시키며, 부적응적 행동을 증가시킬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너무 복잡하고 자극적인 환경 역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벌린의 초기 연구 및 후속 실험에서 입증된 결과에 따르면, 복잡성에도 일종의 적정 지점이 있다고 합니다. 즉, 반복되는 고층 빌딩 숲이나 아파트가 길게 늘어선 도로를 오랫동안 걸으면 지루해질 수 있지만, 너무 현란하거나 자극적인 시각적 요소가 많을 때도 불쾌감이 느껴지거나 과부하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을 둘러싼 도시나 환경은 우리들의 관심을 끌 만한 기발한 구조물이나 흥미로운 장소들이 곳곳에 스며들도록 설계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세계의 여러 도시 설계자들이 이러한 실험 결과들을 반영해서 행복하고 활기찬 도시를 설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스웨덴의 스톡홀름이나 호주의 멜버른 같은 도시들은 새 건물을 지을 때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어울리게 설계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유리창으로 건물과 거리 사이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솝 우화 <시골 쥐와 도시 쥐>에서는 시골에 살던 쥐가 도시에 살던 쥐를 초청합니다. 그러나 시골을 둘러본 도시 쥐는 시골 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시골 쥐야, 왜 이렇게 지루한 곳에서 사니? 내가 사는 도시에 한 번 오지 않을래? 그러면 신기한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이 말을 듣고 시골 쥐는 도시 쥐가 살던 도시의 거리로 향합니다. 그러나 막상 도시 구경을 나온 시골 쥐는 너무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도시가 위협적이고 무섭게만 느껴집니다. 시골 쥐는 급히 시골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릅니다.

시골 쥐와 도시 쥐 모두 자신이 오랫동안 머물던 환경에 적응하고, 익숙한 것에서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두 쥐 모두 낯선 환경에 처했을 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탐색하거나 새로운 자극을 기꺼이 향유하기보다 익숙한 동굴 속으로 다시 발길을 돌리고 맙니다. 

만약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의 뇌와 마음이 일상의 익숙함을 지루함으로 인식하는 순간이 잦아진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의 풍경이나 장면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권태가 우리의 정신을 잠식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의과대학 학사 , 석사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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