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이제 막 회사생활을 시작한 늦깎이 사회 초년생입니다. 오랜 기간 마음 한구석에서 저를 괴롭히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번아웃과 비슷한 상황에서 제 삶에 ‘나 자신’이 없다고 생각되고, 제가 뭘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쉴 새 없이 열심히 살았습니다. 독하게 항상 일등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남들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도 싫었거든요. 그래서 고등학교 성적도 항상 좋았고, 한 번에 명문대에 합격했습니다. 요즘 같이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몇 년간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다 실패하고도 금세 괜찮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시험에는 낙방했지만, 마지막으로 고사장에서 나오면서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고 후련함만 느껴질 만큼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었어요. 한 번쯤 해 보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저 제 길이 아니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안정된 직장에 자리도 잡아서 더 이상 불안함을 느낄 것도 없고, 이제는 돈도 시간도 있어서 뭐든 할 수 있는데, 저는 왜 이렇게 공허하고 불안할까요? 수험생 때 늘 그랬고, 사실 그 이전부터 그랬습니다. 여전히 항상 계획을 세우고, 시간표를 빽빽하게 만들어 살고 있습니다. 퇴근 후엔 영어 학원도 다니고, 직무와 관련된 자격증을 따기 위해 강의도 듣고 있습니다. 꼬박꼬박 운동도 하고 있고, 주말마다 사람들을 만날 시간도 따로 빼 놨고요. 더 이상 계획을 수정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나니, 이제는 멍하니 누워 있거나 의미 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제가 쉬고 싶어서 이렇게 쉬는 거라면 모르겠으나,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함이에요. 빨리 잠들기만을 기다리기 때문에 전혀 휴식으로 느껴지지도 않아요.

저는 이런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빈 시간이 있는 게 두렵고, 그런 시간에 부딪히면 불안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일이 많아서 야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느껴질 정도니까요. 이것저것 배우는 것도, 사람들을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정말 즐겁고 좋아서 한다기보다는 ‘해야 하니까’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뭘 해도 즐겁지 않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 해야 하는 일이나 잘하자는 느낌이랄까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항상 욕망을 유예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릴 때는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서 늘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았거든요.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결국 마음을 접고, ‘나중에 여유가 되면 하자.’라는 과정을 많이 거쳤어요. 나이가 들면서는,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라는 이유로 똑같이 미루곤 했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고 나니, 이제는 제가 뭘 하고 싶은지도 어디서 삶의 에너지를 얻는지도 모르겠어요. 열심히 살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는 것도 보람차긴 한데, 그뿐이에요. 이런 것들이 온전하게 나를 채워 주는 것 같지는 않고, 공허하게만 느껴집니다. 번아웃과 비슷한 상황 같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제는 뭘 해도 그렇다는 걸 알기 때문에 뭔가 시도조차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어 간다는 점, 이런 시간이 늘어갈수록 불안감이 더 커진다는 점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열심히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 스스로 충전할 방법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지금 제 상태가 위태위태하다는 걸 느낍니다. 과연 어떻게 제 문제를 마주해야 할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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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의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현재 사회 초년생으로 성실히 직장생활을 해 나가는 직장인이신 듯합니다. 그런데 최근 인생에서 '나 자신'은 없고, 사연자님께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알 수 없어서 허무감과 혼란감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적어 주신 사연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읽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그동안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오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연자님 스스로도 쉴 새 없이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할 만큼 말입니다. 그런데 나름 만족할 만한 직장을 얻고, 또 예전처럼 돈이 없거나 시간에 쫒기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별로 즐겁지도 않고, 오히려 공허하고 불안감을 느끼는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으실 겁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수험생 때부터, 그리고 그 이전부터 항상 계획을 세우고, 시간표를 빽빽하게 채워서 그대로 이행하는 착실한 삶을 살아오신 듯합니다. 그러한 생활 패턴을 현재도 고수하시면서 미래를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계시고요. 퇴근 후엔 영어 학원, 자격증을 따기 위한 강의 듣기, 운동과 사람 만날 시간까지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채우다 보면 어쩐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같습니다. 

물론,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게 실행을 하고, 성과를 내고, 또 생산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건설적으로 살아 나가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항상 건설적이고 생산적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항상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때로는 좀 쉬어도 가고, 계획 없이 움직이기도 하고, 계획대로 안 될 때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흘려보내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 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보고 싶은 친구에게 연락해 보기도 하고, 사랑하는 친구나 연인,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아무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 보기도 하고…… 우리의 삶은 이렇게 많은 여백과 계획 없는 시간들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시간들이 빡빡한 우리의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연자님께서도 사연에 적어 주신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열심히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매진하다 보니, ‘삶은 언제나 열심히 살아야 하는 순간들로 채워져야 한다.’고 하는 약간의 강박이 생기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움직이다 보면, 늘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겨 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강박적 사고 때문에 힘드시다면, 불안에 대한 조금 다른 태도와 시각을 가져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불안은 ‘없애야 할 느낌’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며, 적당한 수준의 불안은 사실 ‘위험한 신호’를 감지하고 도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감정입니다. 물론 과도한 불안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연자님께서는 아직 그 정도로 과한 불안을 느끼시는 상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뭔가 열심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압박감이나 불안감이 느껴지실 때면, 그저 ‘지금 불안감이 좀 느껴지네.’ 혹은 ‘불안감이 올라오네.’ 하고 현재의 불안감을 인정하고, 그 불안감이 차차 가라앉도록 심호흡도 해 보면서 불안감이 옅어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조금씩 불안 수준이 낮아지면서 흘러가는 경우도 생깁니다. 불안을 과도하게 밀어내다 보면 더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에, 불안과 함께 지내는 연습을 해 보는 것입니다. 

또 불안은 대개 사소한 걱정거리들과 함께 동반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아예 하루 중 걱정하는 시간을 짧게라도 만들어서 그 시간에만 마음껏 걱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걱정거리들 중에는 대개 걱정해도 딱히 내가 컨트롤할 수 없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걱정거리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걱정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자신의 생각을 검토해 보고, 좀 더 타당하고 적응적인 사고로 바꾸다 보면 걱정하는 습관이나 불안감 수준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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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자님께서는 혹시 안식년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안식년은 보통은 6년 동안 강의나 연구를 열심히 한 교수들에게 부담 없이 일 년 동안 재충전의 기회를 가지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이 안식년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의 농사 경작 방식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6년간 농사한 다음 해인 7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쉬게 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안식년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회복’에 있습니다. 생명의 텃밭인 대지조차 안식년이 필요한데,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사연자님께서도 지금껏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만큼 스스로에게 한 번쯤 ‘안식년’을 주셨으면 합니다. ‘해야만 하는 일들’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시간을 보내셨으면 합니다. 당분간 혹은 오랫동안 무엇을 해도 시큰둥하고,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 자체가 사연자님의 욕구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저 조금 긴 호흡의 쉼이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단기적인 목표를 자주 설정하고, 그것을 당성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실현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당연히 지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 시선과 긴 호흡으로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을 향해 움직일 때, 조급해지지 않고 힘들면 언제든 쉬었다가 다시 힘을 내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연자님께서는 어떨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시나요? 사연자님을 웃게 만드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그동안 미루었지만, 한 번쯤 꼭 해 보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어떨 때 소소한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시나요? 사연자님을 화나게 하거나 슬프게 만드는 일들은 무엇인가요? 지금 당장 보고 싶은 사람은요? 사연자님께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사연자님께서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사연자님,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해 오셨습니다. 이제는 사연자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아 나가는 시간을 통해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아 가고, 에너지를 소진하기보다 채워 나가면서 사연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향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설 수 있으실 겁니다. 마지막으로 ‘목적지향적인 삶’의 선구자인 리처드 라이더가 남긴 명언을 전해 드리면서 사연자님의 고민글에 대한 답장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목표가 아니다. 

목적의식으로부터 목표를 받아들일 때야말로 

진정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인수 원장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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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선생님 글을 만났더라면 좀더 빨리 우울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글 내용이 너무 좋아 응원합니다. 사소한 관계의 행복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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