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이직을 간절히 원하는 20대 후반 여성입니다. 지금까지 몇 년간 영어를 공부하다가 몇 주 만에 포기하고 또다시 시작했다가 또 포기하던 것이 몇 번 정도 되풀이되었는데요, 최근에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공부를 하다 보면, 특히 밤 12시 정도가 넘었을 때, 잠을 자야 하는데 자꾸 더 하게 되고 집중이 아주 잘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러고 나서 오늘 공부한 게 썩 만족스러웠다 싶으면, 제가 원어민 정도의 영어 실력을 장착해서 남부럽지 않게 멋진 모습으로 돈도 많이 벌어서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게 돼요. 그래서 마음이 들떠서 잠이 안 옵니다.

또 어떤 날은 별로 공부를 못한 것 같다 싶으면 심하게 좌절감을 느끼면서 공부할 의지가 꺾여서 다음 날부터 공부를 포기하게 돼요. 자꾸만 마음이 들쑥날쑥해서 포기하게 되니 몇 년간 진전이 없어서, ‘나는 안 되는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지금은 좀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꾸준히 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영어를 원어민같이 너무 잘해야 한다는, 또 빨리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는 것 같아요.


또 한 가지는 제가 너무 결연한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꼭 영어를 훌륭하게 잘해서 이직하지 않으면 ‘난 앞으로의 미래는 없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요.

어렸을 때 끊었던 피아노를 다시 친 지도 3년 정도가 되었는데 실력이 늘면서, ‘이러다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어머니께, “이제 곧 피아노를 마스터할 것 같아!” 하면서 들떠서 이야기하곤 했어요. 특히 새벽 시간에 전자피아노를 새벽 서너 시까지도 계속 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유독 집중이 잘되고 잘 쳐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졸린데도 지금 잘되니까 계속 하고 싶어서 시계를 보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요.

곧 영어를 마스터한다는 둥 피아노를 마스터한다는 그런 말이 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돼서 요즘은 그런 말을 하진 않고, 공부를 하고 나서 정해진 시간에 자려고 하는데 자꾸 너무 들뜨거나 좌절감이 와요. 사실 제가 무언가 한 가지를 꾸준히 오래한 게 별로 없어요. 지금 직장을 몇 년 다닌 것과 피아노를 꾸준히 한 것도 저에게 많은 칭찬을 해 주고 있어요.


또, 제 사고방식이 좀 비약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다가 구직 사이트를 들어가 봤는데, 서울 어딘가에서 제가 관심 있는 분야의 직종을 구인한다는 글을 봤는데, 거긴 이모가 사는 곳이거든요. ‘서울에서 저 일을 하면, 집을 구하기 전까지 이모네 집에 얹혀살 수 있겠지?’, ‘이모랑 친해질 수 있겠구나.’, ‘이모랑 사촌 동생들과 즐겁게 지내야지.’ 하는 생각이 구직하는 지역이 서울 어디라는 것을 본 순간 저절로 들었어요. 정작 저 일을 지원할 것도 아니고, 저는 먼 곳으로 가서 직장을 잡을 생각도 전혀 없는데도 말이죠.

저도 모르게 생각이 불쑥 뛰어넘어서 거기까지 가는 게 이상한데 비정상일까요? 이런 비약적인 생각이 자주 들지는 않아요. 자존감이 낮고 남과 저를 비교하는 사고방식도 있었지만, 제 자신도 충분히 괜찮다고 격려하려고 노력해 오면서 어렸을 때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긴 합니다.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폭력적으로 많이 싸워서 가정에서 눈치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예민하면서 완벽해야 하고 철저해야 된다는 강박관념도 있는 것 같아요. 낮은 자존감과 함께 목표치가 너무 높아서 망상처럼 되어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의 이 문제를 어떻게 고치면 될까요? 

제가 영어 공부를 꾸준히 1, 2년은 해서 만족할 정도로 만들어서 이직하고 싶은데, 정말 매일매일 의지가 들쑥날쑥해서 꾸준히 계속할 수 있을지 염려가 돼요. 일단은 포기하지만 말고, 되던 안 되던 꾸준히 하고, 거짓된 생각에 심취하지 말고, 마음의 평정심을 찾도록 스스로 되뇌면서 계속하려고 마음먹었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지, 생각은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조언을 부탁드려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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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의 고민글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최근 간절히 원하는 이직에 성공하기 위해 미뤄 뒀던 영어 공부에 다시 매진 중인 상황이신데요, 그러는 와중에 과거에 반복됐던 중도 포기 문제가 떠올라 또다시 포기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까 봐 불안감을 많이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영어 공부는 사연자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영원한 숙제’이자, ‘오르기 힘든 높은 산’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만큼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하거나 뛰어난 실력을 쌓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도전 과제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날은 영어 공부를 많이 못한 것 같다고 해서 심한 좌절감을 느끼실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사연자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 머리로는 ‘과잉 반응’이라든가, ‘비합리적인 해석’임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도 감정적인 반응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연자님께서는 이렇듯 영어 공부를 오랫동안 진득하게 지속하지 못하는 것 외에도, 오히려 어떤 날은 영어 공부에 과하게 몰두해서 잠을 자야 하는 상황에서도 중단하지 못하는 행동에 대한 염려도 하고 있네요. 이러한 과몰입 경향은 피아노 연주를 할 때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셨고요. 

누구나 때로 무언가에 빠져 몰입(flow)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골똘히 몰입할 때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낍니다. 다른 부정적인 생각이나 잡념, 고민이나 현실적인 한계들은 잊게 되고, 오로지 그 행위에만 몰두하게 됨으로써 자아의식도 사라지는 ‘무아지경’의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집중(hyperfocus)이란 무엇일까요? 과집중이란 일면으로는 몰입과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정의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주로 ‘시간에 대한 지각이 왜곡되고, 주변 세상에 대한 인식을 못하며, 한 가지ᅠ일을 하다 멈추고 다른 것을 하기 어려운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과집중은ᅠ행동의 효율이 높아져 많은 양의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하고, 기억력이 좋아지며, 만족스러운 결과를 통해 성취감도 느낄 수 있는 좋은 측면이 있습니다. 

ᅠ그러나 과집중이ᅠ문제가 되는 경우는 취미나 게임, 컴퓨터 사용이나, 텔레비전 시청과ᅠ같이 개인적 상황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추어질 때입니다. 그중 주의력이 적절히 안배가 안 된다거나 멈추는 것의 어려움, 작업 전환의 곤란이 발생할 때 문제로 보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불안 증상이 있는 경우에도 과집중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울한 기분이나 불안을 경험하는 상태에서는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이 제한되기 쉬운데, 이럴 때 재미있고, 자극적인 행동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몰입 이론의 최고 권위자인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자기 목적적인 성격”이라고 지칭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은 내재적 동기가 강하고, 외부적 보상보다는 일 그 자체를 위해 열심히 끈기 있게 해 나갑니다. 이들은 성과에는 크게 집착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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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사연자님께서 영어 공부나 피아노 연주에 몰입하는 상황을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영어 공부를 하는 목적이 ‘원어민 정도의 실력을 장착해서 남부럽지 않게 멋진 모습으로 돈도 많이 벌어서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들떠서 잠이 안 올 정도라고 하셨는데요, 이는 다소 ‘비약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연자님께서 1, 2년 안에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해서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이직에 성공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영어 실력의 상승만으로 많은 돈을 벌거나 모두가 우러러보는 상황이 당장에 일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가 성취된 순간을 상상하는 것이 강력한 동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너무 거창하고 원대한 목표는 오히려 현재 자신의 능력이나 수준과 비교해 많은 괴리감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보다는 단기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세움으로써 조금씩 달성해 나갈 때 과제를 지속해 나가는 데 원동력이 되는 성취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연자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꼭 영어를 훌륭하게 잘해서 이직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미래는 없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신데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칫 상황을 연속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이분법적 사고로 현실을 바라보는 ‘흑백논리’적인 경향이 강해 보입니다. 

흑백논리적 사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다.’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실패한 것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번에 기울인 노력을 발판으로 좀 더 노력해서 다음번에 성공할 수도 있고, 꼭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동안 기울인 노력이 의미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을 하거나 실력이 쌓였다면, 그것을 단순히 실패로만 보기는 힘듭니다. 때문에 어떤 상황이나 현상에 대해 ‘도 아니면 모’ 식의 흑백논리를 적용하게 된다면, 상황을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바라보기보다 극단적이고 왜곡해서 받아들이게끔 합니다. 더불어 다음 도전을 위한 스텝을 밟아 나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거기에는 자신이 인지하기도 전에 ‘핵심 믿음(core belief)’이 활성화되면서 자동적으로 작동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처럼 다소 비약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사고가 자동적으로 나타날 때는 그 사고의 이면에 숨어 있는 핵심 믿음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면, ‘영어를 훌륭하게 잘해서 이직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미래는 없어.’처럼 최악을 예측하는 사고의 바탕에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거나 이직에 성공하지 못하면, 나는 무능하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라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의 설정이나 ‘능력이 없으면,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핵심 믿음이 깔려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무언가 한 가지를 꾸준히 오래한 게 별로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한 직장을 오래 다닌다거나 피아노를 꾸준히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실하고, 끈기가 있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라도 스스로의 노력과 성취를 인정하고, 칭찬을 해 주는 모습은 참으로 잘하고 계신 부분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영어 공부나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시는 것은, 별다른 문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실 만한 사항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다만, 다음 날 출근하는 데 영향을 줄 만큼 과집중이 지속된다면, 문제 상황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피아노 연습이나 영어 공부할 시간을 정해 놓고, 정해진 시간이 되었을 때는 과감하게 행동을 멈추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한 영어 공부를 지속해서 실제적인 능력 향상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꾸준함’이라는 절대적 시간의 투자가 필요한데요, 어학 실력이란 것이 노력한 것에 비해 성과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측면이 있어서 꾸준히 지속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작은 단위의 단기적인 목표를 계속해서 세워 나가면서 그것을 달성했을 경우, 스스로에게 보상을 줌으로써 ‘영어 공부’라는 행위를 강화해 나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즉, 목표로 한 진도나 점수를 달성했을 때 혹은 계획한 시간만큼 학습했을 때, 스스로에게 줄 보상물을 정해 놓고 보상을 주는 거예요. 반대로 만약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반성하는 의미로 좋아하는 행위의 횟수나 할당 시간을 줄이거나 물질적인 혜택에 제재를 가하는 등 처벌 항목을 정해서 실행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영어 공부’에 대한 강화를 이어 나간다면 좀 더 현실적으로 목표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으실 겁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원 스텝, 투 스텝 밟아 나가신다는 마음가짐으로, 오늘 스텝이 조금 꼬였다면 내일 다시 꼬인 스텝을 풀고 스텝을 이어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지금처럼만 해 나가신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연자님의 스텝 바이 스텝을 응원하겠습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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