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나름대로 성실하고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는 30대 직장인입니다. 최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서 조용하게 죽은 듯이 살고 싶다.’는 욕구 아닌 욕구가 갈수록 강렬해져 사연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잔뜩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알코올중독자셔서 무척 편찮으셨지만, 아버지가 그런 어머니를 성심껏 보살펴 주셨고, 가까운 친척들도 많은 관심을 주었습니다. 하필이면 어머니 건강이 악화되던 시점이 제가 사춘기일 때라, 머잖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더 잘해 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크게 좌절하기도 했지만, 가족과 친구들의 지지로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들 중 한 명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께 강도 높은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저는 며칠 뒤 술을 잔뜩 마시고 제 어머니 노릇을 해 주시던 그분의 배우자를 찾아가 붙들고 ‘내 친구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데 가족들에게 밝히면 다들 혼란스러워할 것 같아 걱정하고 있다.’며 제 이야기가 아닌 척, 그러나 도움을 구하듯 울면서 털어놓았습니다. 제 이야기라는 걸 아셨을 거예요. 알고도, ‘숨기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하셨고요. 저를 성추행한 그분 또한 그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었고, ‘숨겨야 한다.’는 같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술이 확 깨더군요. 그 이후로 그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럼에도 삶은 이어졌습니다. 과거 사건은 사건일 뿐, 내가 희생자가 되지 않기로 선택한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는 거라고 하잖아요? 당당하게 따지지 못할 거라면 그냥 덮고, 덮기로 결심했다면 내 삶을 살아가자고. 돌이킬 수 없는 일 때문에 오늘의 나를 괴롭게 만들지 말자고 많이 되뇌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성추행한 분도, 그분의 배우자도, 현재까지 저와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가까운 가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쩍 이상합니다. 그분의 배우자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정말 어머니 같은 분이고,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으니 그만 연연해야지.’ 하는 마음인데도 그분께 전화가 걸려오면, 참기 어렵게 분노가 치밉니다. 조금 더 다정하게 전화를 받아도 될 텐데, 날카롭게 받아치게 됩니다. 전화를 끊고 나면 그렇게 죄송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까 휴대폰 액정에 그분 이름이 뜨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어디론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걸까요? 그렇다기엔 너무나도 성실하고 즐거운 모양새로 일을 하고, 연애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여행을 다닙니다. 그런데 당장 오늘 자정에 제 삶이 끝난다고 해도 아깝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욕구도,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욕구도 없고, 당장 내가 가진 모든 걸 잃는다면… 글쎄요… 어디론가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게 편하겠다는 이상한 생각도 듭니다.

죽고 싶다거나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다는 마음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 지금 누구보다도 열심히 즐겁게 잘 살고 있거든요. 친구들도 가족들도 너무 자상하고 고맙고 소중합니다. 행복한 삶입니다. 그런데도 이대로 사느냐, 확 떠날 것이냐, 선택할 수 있다면 고민하지도 않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 버리고 싶습니다. 

제가 제 과거를 부정하고 싶어서, 그냥 떼어 내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요? ‘앞으로 또 어떤 불행이 나를 덮칠지 몰라. 그러니 굳이 또 아등바등 노력해서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인지 왜곡이 무기력감으로 이렇게 나타나는 걸까요? 제가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대한 가짜 욕구를 해소해 버리고, 현재의 제 삶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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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께서 올려주신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도 좀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동안 힘든 마음을 꾹꾹 누르면서 밝고, 성실하게  살아오신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여 정말 잘해 오셨다고, 대견하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쩌면 과거에 일어난 가슴 아픈 사건들을 인정하는 것이,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너무 아파서 차마 꺼내 보지도 못하고 꾹꾹 눌러 마음속에만 묻어 두신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잔뜩 받으며 자라셨다.’고 가정환경이나 성장 배경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셨네요.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힘든 일을 겪으시고도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삶을 꿋꿋이 살아가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많이 받아 오셨다고 느끼셨다면, 그것이 사실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사연자님께서는 어린 시절 알코올중독자인 어머니로부터 세심한 보살핌을 받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으셨을지 궁금합니다. 알코올중독으로 아픈 어머니께서 사연자님을 살뜰히 챙기기는 힘드셨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어머니를 보살피셔야 했기에, 어쩌면 사연자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도 마음껏 응석을 부리거나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한 채, ‘스스로 알아서 잘해 나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성장해 오시지는 않으셨나요.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많이 편찮으셨던 어머니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불안하고 걱정되는 상황 속에서 사연자님의 마음이 편안하거나 안정적이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한창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아직 어머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때에 어머니를 보내 드렸어야 하는 사연자님의 마음은 또 얼마나 슬프고, 아프셨을까요…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크시리라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연자님 특유의 강인함과 긍정성으로 주변 사람들이 진심으로 건네는 위로에 힘을 얻고, 인생의 큰 시련의 한 페이지를 잘 넘겨 오신 듯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마치 어머니처럼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친척 분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건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충격적이고 감당하기 힘든 일이셨을 겁니다. 더군다나 그 일에 대해 넌지시 언급했음에도 외면했던 그분들의 행동에 다시 한 번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사람에 대한 불신감마저 마음 깊이 새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죄책감과 분노 사이에서 그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고 싶은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내 마음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상대의 잘못이 명백하고,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게다가 그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 그런 사건이 발생하기 전과 같이 변함없이 잘 지낸다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사연자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 외에 분노가 치밀고, 그로 인해 죄책감을 가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인정하기 힘드시겠지만, 사연자님께서는 성추행의 ‘피해자’가 맞으십니다. 그렇기에 성추행 가해자에 대해 분노와 미움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정당한 감정이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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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자님께서는 그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이미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책감과 분노 사이’라고 표현하신 데도 상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일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가슴속 깊이 묻어 뒀던 슬프고, 아프고, 화나고, 원망하는 감정들이 지금 마음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셨으면 해요. 그 솔직한 마음속 외침을 이제는 외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마음껏 미워하고, 분노해도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터지고 말 감정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부디 죄책감은 덜어 내셨으면 합니다. 사연자님의 잘못이 아니니까 말이죠.

무엇보다도 성추행의 가해자에게 양가감정이 들기 때문에 너무도 괴로우실 거예요. 상대는 친절과 보살핌을 베푼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끔찍한 기억을 심어 주고, 외면했던 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연자님께서는 그들이 사연자님께 행한 잘못은 그대로 덮어 두고 대면하고 있으시니 괴로울 수밖에요. 일단은 과거의 일들이 마치 없던 일처럼 그분들을 대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 멈추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분들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아픈 경험이 떠오르는 ‘트라우마’의 기억이 재현되는 것과 같은 고통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으로 말씀 드리기 어렵다면, 조금 에둘러서 ‘요즘 들어서 예전에 힘든 일들이 자꾸 기억나서 많이 힘드니, 당분간은  연락해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기다려 달라.’고 의사를 표현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연자님께서 그분들과 대면할 마음의 준비가 되셨을 때, 그때 연락하신다면 좋겠어요. 그리고 만약, 그 시간이 많이 길어진다거나 아예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사연자님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편해지는 쪽으로 말이지요.

 

사연자님께서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셨어요. 어쩌면 주변에 사랑하는 친구도 가족도 모두 있지만 정작 너무 힘들었던 일을 터놓고 도움을 받고 싶었을 때,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받지도 못했다는 무력감과 원망의 마음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제라도 그 일들을 가족에게 털어놓고 싶다면 그것 또한 괜찮습니다. 충분히 고민해 보시고, 지금이라도 솔직히 이야기하고 위로받고 지지받으시고 싶다면, 마음이 가는 쪽으로 움직이세요.

사연자님께서 성추행을 당했을 당시에는 그것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그저 모든 일들과 감정을 덮어 두는 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연자님께서는 조금씩 더 단단해지셨을 테고, 어쩌면 이제는 사연자님께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일들을 억압하지 않고, 해결하고 소화해 내고 싶을 만큼 내면이 성장하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비록 힘드시더라도 이제는 그 일들을 다시 꺼내어 들추어 보고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연자님을 옭아매는 그 올가미를 직접 손으로 잡아서 푸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작업은 꽤 힘들고 시간이 많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또 혼자서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어요. 따라서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전문가나 상담가와 함께 이를 다루고, 오래된 상처에 대해 치유하고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힘든 일들을 겪어 오시면서도 사연자님께서 자신의 삶을 잘 꾸려 오신 것을 보면, 충분히 내면적인 힘이 있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부터 ‘가짜 욕구’는 벗어 던지시고, ‘진짜 욕구’에 귀 기울여 보는 연습을 해 보세요. 어딘가로 훌쩍 떠나지 않고도,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현재의 삶에 집중하면서 작은 행복을 느끼시는 일상이 조금씩 찾아올 것임을 믿고 응원하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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