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덕한 정치인을 보면 우리는 분노한다. 선량한 시민 중 한 사람인 내가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새똥을 맞아도 우리는 분노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며 비웃는 것 같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세탁을 해야 하는 것은 덤이다. 인터넷 뱅킹 비밀번호를 계속 틀릴 때면 우리는 분노한다. 내가 목표한 금융 업무를 못하고, 더 틀린다면 번거롭게 은행을 방문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분노한다. 분노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나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이 그 뿌리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약 안먹이고 아기 키우기 (이하 안아키)’에 분노하는가?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안아키의 피해자인 어린아이 일 리 없지 않은가.

 

겉으로 보기에 안아키 사건 자체는 전혀 신선하지 않다. 자연의 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치유력, 혹은 종교적 능력을 운운하며 검증되지 않은 자칭 치료자가 다수의 피해자를 만들었던 사건은 수 없이 많다. 이런 신선하지 않은 사건에 우리가 이렇게 뜨거운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진 픽사베이

 

한의사. 지금까지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는 의료사고 피의자로 언론에 등장하곤 했으며, 법적 공방의 핵심은 교과서적인 진료를 얼마나 적절히 수행했는가 였다. 하지만 안아키 사건에서는 교과서적인 진료 여부가 문제가 아니다. 안아키 치료법 자체를 대부분의 의사가, 심지어 대한한의사협회에서 조차 부정하고 있다. 비싼 의료비를 지출하면서 병원에 가는 기본적인 이유는 의료진을 믿기 때문이다. 그 신뢰는 국가가 의료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안아키 사건은 국가가 인정한 의료인, 의료체계에 대한 신뢰를 흔들기에,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며 분노하는 것이다. 학창시절 내가 좋은 친구라고 믿고 있던 친구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확인했을 때 느꼈던 허탈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이. 어린 개체를 보호하는 것은 본능이며 동물에게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 사건의 피해자가 성인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의 적절치 못한 선택 때문에 아이들이 고통을 받았기에, 우리는 아이들의 대변인으로서 분노하게 된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우리에게 못되게 굴지라도 내 속마음을 시원하게 쏘아대지 못했던 것을 떠올려보라. 그렇기 때문에 안아키로 인해 고통 받은 아이들을 대신해 지금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이다.

 

우리 자신. 당신은 부모나 자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본 적이 있는가. 온갖 터무니없는 치료들을 보면서, 묘하게 그런 치료들이 매력이 있어 보인적은 없는가. 혹은, 이 비밀스럽고 멋진 치료를 내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생각을 한 적 없는가. 이런 적이 있다면, 과연 우리는 안아키의 부모와는 얼마나 다를까. 안아키의 부모에게서 보이는 어리석음이 사실 나에게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화가 나는 것이 아닐까. 비밀번호를 잊었을 때 스스로를 바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화를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안아키에 빠지게 되는 과정은 이전 기사를 참고하길 바란다. http://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011 )

 

사진 픽사베이

 

분노는 파도다. 이 힘으로 전기를 얻을 수도 있고. 단단한 바위를 모래로 만들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파도를 바라보고, 파도가 오는 방향을 예측하고, 우리가 유용하게 쓸 수 있게 조작을 해야 한다. 분노도 마찬가지다. 분노를 바라보고, 분노의 이유를 생각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그 분노를 이끌면 된다. 그러면, 할 일을 마친 파도는 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