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8일.

 

건강한 적정 거리

어느덧 6회차다. 6주간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 서울숲에서 모임을 했다. 이 시간대로 정한 이유는 아침 10시부터 12시, 오후 3시부터 6시 사이가 숲에서 피톤치드가 가장 왕성하게 나오는 시간대라고 하셨다. 바람도 잘 불지 않는 이날은 피톤치드가 날아가지 않고 모이고 쌓여, 우리에게 진하게 느껴질 것이라고도 하셨다. 사람은 듣는 대로 믿고 싶어진다. 건강에 좋은 물질이 날 둘러싸고 있다고 느껴지니 기분이 훨씬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다만, 6회 중에 정신건강 때문에 두 번 빠졌으니, 네 번 참석한 셈인데, 이것을 참석했다고 해도 될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금요일 저녁이면 다음 날 스케줄을 위해 긴장하고 토요일 아침이면 몇 시간 일찍 일어나 향을 피우고 차분히 하루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실 집 근처에 숲이 조금 있는 편이라(그럼에도 잘 가지 않지만), 서울숲까지 앞으로 갈 일이 있을까 싶다. 게다가 주말 아침에, 사진기를 들고. 그만큼 특별한 경험이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아주 특별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아픈 사람들 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뭐 어떻냐고? 자신의 마음을 돌볼 줄 알고, 직면할 줄 안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만큼 남의 마음을 마주했을 때도 자신의 마음만큼, 혹은 보다 더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역시 그러했다. 우리는 둥글게 모여 대화할 때, 처음엔 어색해서 하기 싫어했지만(모두 다) 하나같이 누가 그랬냐는 듯이 상처를 보듬어 주기 시작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에게 말하듯, 남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마음이 어딘가 후련하고 바람이 통하듯 시원했다. 우리는 어쩌면 듣고 싶었던 말을 서로에게 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남들보다 능숙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참 좋았다. 모난 곳을 당황해하지 않았고, 흠집 난 곳을 만지지 않고 다룰 줄도 알았다. 

 

 

숲 속 나무와 풀 아래 우리도 생명체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사이 본 모든 것이 신기했고, 동시에 모든 것들이 자연의 섭리대로 흐르고 있었다. 마땅히 나도 너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우스우면 웃어야 했고, 슬프면 고개를 떨구어도 됐다. 슬퍼하면 어깨에 손을 얹어 주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했기에, 그렇게 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선을 넘어서지 않았다. 비하하는 농담을 하지 않았고, 몸을 밀치며 장난치지 않았다. 나무들이 서로 잎으로 적정 거리 두기를 하듯이, 사람도 건강한 적정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족도, 친구도, 적절히 친해진 남도, 건강한 적정 거리가 필요하다. 그 누구도 건강한 거리를 건너뛰어 넘어올 권리는 없다. 나는 나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성인이 되고 나서도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알 수 있었다. 수시로 방문을 열고, 심지어는 발로 차는 엄마에게 사생활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숴질 수 있다는 위태로움을 겪고 난 후였다. 당연한 권리를 그때는 ‘낳아 줬다.’는 이유로 존중하고, 따르기만 하다가 내 것을 모두 잃고 한참 후에야 알았다. 나 혼자 조용히 가만히 있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있고 싶은 시간만큼.

 

 

숲은 그것을 허락해 줬다. 가만히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았다. 잎에 쓰고 싶은 것을 쓰라고 하셔서 한 자락 쓰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나뭇가지는 멈출 듯 그러지 않고 옅은 파도를 타듯 흔들흔들, 고개를 넘듯이 살랑거렸다. 적당한 질서와 한없는 자유를 느꼈다. 

 

 

자유 속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는 거리. 내가 아주 배우지 못한 것. 숲이 내게 일러 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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