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서른 살인 여성입니다. 저는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쭉 정신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우울증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일상생활도 무사히 하고 공부도 꽤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제 과거의 트라우마? 불행?에 얽매여서 하루하루를 고통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욕심이 나서 스무 살 때 재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수의 압박감 등으로 인해서 재수 도중에 우울증(당장 병원에 가야 될 정도로 중한 수준)이 생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재수도 완전히 실패해서 원치 않는 대학의 원치 않는 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재수를 실패한 후, 2년여 정도 폐인이 되어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고생하고 나서 겨우 정신과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우울증 상태가 계속 좋지 않아, 대학생활도 아주 엉망으로 하고 겨우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에 본가에 내려가게 되었고, 본가에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활하니 우울증 상태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보다는 꽤 좋아졌습니다.

그치만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이 남아서 그 이후에도 긴 방황의 시간을 보냈고, 중간에 취업도 잠깐 했지만 금방 그만두는 등의 생활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현재는 많이 회복되어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입니다. 그런데 사실 9급 공무원 시험은 원래 제가 꿈꾸던 것과는 좀 다르긴 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시험을 준비하면서 자괴감이 조금 듭니다. 게다가 100명이 시험을 치츠면 두 명이 붙는 그런 시험에(확률이 아주 적은 시험에) 뛰어들어야 되는 것 자체가, 너무 희망이 적은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는 우울증 때문에 재수도 망하고, 대학생활도 망하고, 결국엔 내 인생도 망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나도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잠재력이 많고 희망찬 사람이었는데, 재수없게 인생이 끝장났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고 불행할까? 남들은 운좋게 좋은 인생을 사는데, 왜 내 인생만 이럴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매일매일 마음이 너무 괴롭고, 죽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듭니다. 또 후회와 자책감도 너무 많이 듭니다. 

 

‘재수를 아예 하지 않았다면 우울증에 걸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면 내 인생이 지금과 다르게 좋게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재수를 인강을 듣고 독학으로 했는데, 차라리 기숙학원 같은 데 갔으면 결과가 좀 더 좋지 않았을까?’

‘재수가 아니라 반수(대학에 일단 등록하고, 입시 준비를 하는 것)를 했으면, 내 인생이 지금보다 훨씬 더 좋게 바뀌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머릿속에 맴돌아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괴롭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는 수준입니다. 저는 정말 어쩌면 좋죠? 이대로 그냥 죽는 게 답일까요? 왜 제 인생만 이렇게 불행할까요?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하루도 빠짐없이 과거 입시 때를 회상하며 후회, 자책을 반복하고 있다고 하시니 참으로 괴로우실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러운 생각 속에 머물고 계셔서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일단 죽는 선택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울 증상이 심한 분들은 ‘죽으면 모든 고통이 해결될 것이다.’, ‘지금 삶을 이어 가는 것보다는 죽음이 낫다.’고 기대하면서 죽음을 고통의 출구로 이상화하는 사고가 강해지기 쉬운데요, 현실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각할수록, 무망감이 클수록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죽음 이후는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라서, 고통이 정말로 죽음으로서 끝나는지, 삶보다 죽음이 나은지는 결코 미리 알 방법은 없습니다. 고통의 해결책은 죽음이 아닌 현재 삶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단단히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금의 삶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조절하고, 과거에 한없이 머무는 습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끊임없이 삶을 과거 사건에 매몰되도록 만듭니다. 사연자님도 세세하게 잘 적어 주신 생각의 흐름들을 보면, 대부분 생각의 시제는 ‘과거’에 멈춰 있습니다. ‘그때 그랬더라면…, 안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은 아주 달콤한 통제감을 줍니다.

물론 지금 상태 그대로 과거로 돌아간다면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쨌든 과거에 했던 선택은 나름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거쳐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즉, 과거 사연자님의 선택에 대해서는 항상 당시의 관점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지금은 경험도 쌓이고 시간도 흘러서 ‘다른 사람으로서’ 과거를 평가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빈틈과 가능성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과거를 수정하면서 좋게 변화된 현실을 상상하는 동시에, 실제 현실은 수시로 부정하게 만듭니다. 입시 실패는 사연자님이 겪은 중요한 삶의 경험인데, 이를 싫어하고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계속 가정법, 즉 다른 현실을 상상하는 데 정신적 에너지를 끊임없이 소모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경험들은 계속 놓치게 됩니다. 사실 행복감은 불행이 사라지면 오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존감이 높거나 성취 경험을 해야만 오는 감정도 아닙니다. 어떤 조건 없이도 단순히 ‘지금 이 순간 현재’에 머무를 때 느낄 수 있는 일시적인 감각입니다. 

사연자님의 불행감이 줄어들고, 행복감을 빈번히 느끼기 위해서는 ‘현재’에 몰입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동시에 과거 실패 경험을 재해석하고, 좌절감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과거가 떠오를 때마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현재 시점으로 돌아오려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어렵지만 연습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경험들은 결코 다시 수정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그 당시 사연자님의 서툰 선택을 안타까워하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존중해야 합니다. 

 

사실 잘못한 선택, 망한 선택, 실패, 실수는 모든 이가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삶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러한 부정적인 경험을 소화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경험 그 자체보다도 경험에 대한 해석이 이후의 행불행(幸不幸)을 결정짓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일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에 찾아온 ‘불행’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경험에 대한 해석 정도입니다. 언뜻 아주 작아 보이는 영역이지만, 고통의 크기와 지속 수준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사연자님께서 오랜 시간 과거를 반추하고 머무는 습관은 10년 이상 되어 단번에 바꾸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꾸준한 운동으로 체형이 바뀌는 것처럼, 마음의 습관도 노력을 기울이면 반드시 변화합니다. 고통스러운 과거에 머무는 습관이 사연자님 마음이 편안해지는 데 전혀 도움울 주지 않음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사연자님의 건강을 위하여 새로운 마음가짐을 연습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꾸준한 심리상담을 통해 부정적인 경험을 다각도로 해석하고 정리하면서, 불행감과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만약 상담할 용기가 아직 나지 않는다면 사연자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심리 콘텐츠를 다양하게 접하는 것부터 출발해도 좋겠습니다. 2020년에 출간된 『마음챙김으로 우울을 지나는 법』이라는 서적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과거보다 현재에 머무는 습관을 형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모쪼록 사연자님의 삶이 조금 더 평안하고 가벼워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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