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커피를 마시던 그가

  갑자기 일어나 다른 테이블로 간다.

  처음 보는 남자와 시비가 붙었다.

  왜 내 여자친구를 자꾸 쳐다보냐는 거였다.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갔다.

  창피해 미칠 것만 같다.

  그를 만나면 늘 조마조마하고 불안하다.

 

  손찌검까지는 한 적 없었는데,

  어제는 욕을 하면서 내 뺨을 두 대나 때렸다.

  아픈 건 둘째치고 어이가 없어 눈앞이 하얘졌다.

  내가 지금껏 이런 남자를 만났던 거야?

  맞은 것만큼 나도 그놈 뺨을 후려갈기고

  실컷 욕이라도 퍼부었어야 했지만,

  너무 무섭고 떨려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정말 두렵다.

 

  회사 앞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다.

  꽃다발을 내민다.

  정말, 미안해.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야.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딱 한 번만 용서해 줘…….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무릎 꿇고 눈물 흘리는 그를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냉정해져야 하는데,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아, 진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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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감정 중에 좀처럼 참기 힘든 게 ‘화’다. 못마땅하거나 언짢은 일이 생겼을 때 불쑥 치밀어오른다. 이성의 힘으로 억누를 뿐 화가 나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다. 만약 화가 날 때마다 이를 분출한다면 세상은 전쟁터가 되고 말 것이다. 화를 내는 건 자신의 마음은 물론 타인의 마음에도 불을 지르는 행위다. 정식 의학 용어는 아니지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화를 삭이지 못해 생긴 몸과 마음의 질병이 ‘화병’이다. ‘분노’ 역시 화와 같은 의미다. 분개하여 몹시 성을 내는 것이다.

  화와 분노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동물과 달리 인간은 화와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하지 않는다. 교육과 경험을 통해 타인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감정을 다스리면서 양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건강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다수인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그런데 충분히 교육받고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도 화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분노를 조절하는 게 어려워 과도한 방식으로 표출함으로써 정신적, 신체적, 물리적 피해를 경험하는 걸 간헐적 폭발성 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라고 한다.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면서 고함이나 비명을 지른다든지, 주먹을 휘두르거나 물건을 집어 던진다든지, 말이나 행동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부당함, 좌절감, 무력감과 같이 부적응적인 형태가 계속될 경우, 격분이나 울분 등으로 이어져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조절과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

  원인은 호르몬 분비 이상, 뇌 기능 이상, 어린 시절의 학대, 외상에 대한 지속적 노출 등 다양하다. 이들은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겨 반복적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분노를 일으킨 다음 만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이후에 찾아오는 후회와 허무감 등으로 인해 스스로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연인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을 데이트 폭력,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을 가정폭력이라고 한다. 화와 분노를 참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행동이다. 애인이나 배우자 혹은 자녀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결코 사랑이 아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다.

  특히 데이트 폭력은 연인이라는 친밀한 관계의 특성상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성적인 폭력은 물론 과도한 통제, 감시, 폭언, 협박, 상해, 갈취, 감금, 납치, 살인미수 등이 모두 데이트 폭력의 유형이다. 우리 주변에는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연인인데도 만나는 게 즐겁기보다는 두렵다. 화를 낼까 봐 무서워서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없다. 자꾸만 강압적인 태도로 성관계를 요구한다. 화가 나면 주먹을 휘두르거나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진다. 수시로 스마트폰을 검사하면서 꼬치꼬치 행적을 캐묻는다. 내가 만나는 연인의 행동이 이렇다면 그 사람은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울러 나는 이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폭언이나 강압, 강요 등도 데이트 폭력이거나 시발점일 수 있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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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트 폭력 가해자들은 왜 자신의 연인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들은 우울하고 자존감이 낮거나 삶에 대한 의욕과 열정을 상실한 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대상에게 과도한 집착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로 여겨 지배하려 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집착이 강해지면서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며 상대방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시험해보려는 심리가 깔려 있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이다. 이는 왜곡된 성 의식이나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성성을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정신분석적으로는 예전에 아버지나 상사 같은 강한 남성성과 권위를 가진 대상으로부터 받았던 자존심의 상처를 보상받으려는 심리로, 자신보다 약한 상대방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을 공격했던 사람과 같아짐으로써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려는 잘못된 행동이다.

  가해자들은 연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후에 대개 이렇게 말하며 손이 발이 되게 빈다.

  “내가 정말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미쳤던 것 같아. 너무너무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내가 너를 진짜로 사랑해서 그랬던 거야. 믿어 줘.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피해자들은 왜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가해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의존 성향이 강하거나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방의 폭력을 자신을 향한 관심이나 애정으로 쉽게 오해한다. 스마트폰을 뒤지고 행적을 캐묻고 감시하면서 다른 이성과 만나거나 연락하는 걸 극도로 차단하는 연인의 행동을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폭력을 행사한 후에 싹싹 빌면서 더 잘해 주면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사랑이 더 깊어졌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관계를 끝내는 데 대한 두려움이 커서 폭력을 당하면서도 무력하게 지내기도 한다.

  약자인 피해자는 강자인 가해자를 신고하거나 고소하기 어렵다.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폭력을 당하고도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선처를 호소하거나 합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게 피해자들이 처한 현실이다. 폭행죄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으면 수사나 처벌이 진행되지 않는 반의사불벌죄다. 가해자는 이를 악용하고 피해자는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 피해자는 계속 폭력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 안타깝게도 피해자의 이 같은 심리로 인해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데이트 폭력 범죄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데이트 폭력에 대한 사회적 각성이 이루어져야 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어야 하지만, 피해자의 신속하고 단호한 대응 역시 강조되어야 한다. 화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사랑하는 연인에게 폭력을 쓰는 사람이라면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내가 못나서 그렇다느니, 내가 빌미를 줘서 그런 거라느니 하면서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인 자신에게 돌리며 상황을 대충 무마하면서 결혼에까지 이른다면 가정폭력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폭력은 강화되고 반복된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못 본 채하고,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린다면 폭력은 계속 자라날 것이다.

  데이트 폭력은 사랑싸움이 아니다. 사랑으로 포장된 악의적인 범죄다. 딱 한 번 실수로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폭력을 행사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폭력은 습관이며 버릇이다. 연인에게서 폭력을 당했거나 병적인 폭력성을 발견했다면 타이르거나 용서하려 하지 말고 즉시 연인 관계를 끝내는 것이 좋다. 그 사람을 고쳐서 좋은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만용은 부리지 않는 게 현명하다. 사람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연인 관계를 끝냈는데도 상대방이 계속 스토킹하거나 괴롭힌다면 법적, 제도적 수단을 동원해 이를 막고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 폭력은 관용과 순응이라는 착각의 늪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는 괴물일 뿐이다.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성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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