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A는 요즘 엄마와 대화할 때면 이 말을 수차례 속으로 삼킵니다. A의 엄마는 최근 직장 동료들과의 큰 다툼 뒤 일을 그만뒀습니다. 처음에는 금방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지만, 공백기가 길어지자 점점 불안해했습니다. 이제 A의 엄마는 퇴사를 후회합니다. 유일한 낙은 A에게 자신이 얼마나 우울한지 토로하며 이전 동료들의 뒷담화를 하는 것입니다. 엄마의 기분이 좋아질 수 있도록 노력하던 A는 어느샌가 구직활동도 그만두고 불평불만만 하는 엄마가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됐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A의 사례는 연인이나 친구, 가족 관계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입니다. 한쪽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것이죠.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상담이 아닙니다.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듯, 감정을 쏟아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에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암 수술 후 회복 중인 ‘난희’를 찾아온 친구가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장면입니다. 상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속마음도 털어놓지 못하느냐?”고 변명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대화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가깝습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바람직한 인간관계는 자석의 N극끼리 만났을 때와 비슷합니다. N극과 N극은 아무리 붙여 두려고 해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반면에 N극과 S극은 강한 힘으로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상대의 우울과 불안에 휩쓸리다 보면 서로의 감정이 뒤엉켜 완전히 붙어버린 N극과 S극처럼 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A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끝없이 쏟아지는 우울과 불안의 감정을 더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토로하는데요. 이런 관계에 적응되면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내 마음이 좁아서’, ‘내 이해심이 부족해서’ 등 비난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자책하게 됩니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주고받는’ 소통이 아니라, 노동 혹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진다면, 이는 관계의 균형이 깨졌다는 신호입니다. 그럴 땐 관계를 잠시 멈추고, ‘나’만의 공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 약간의 여유를 통해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이 건강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만의 공간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소개해 드리는 네 가지 방법을 통해 자신만의 해법을 모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① 물리적인 거리 두기 

‘Oxford Academic’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대학생 104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의자에 등을 기댄 자세로 과제를 받은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과제의 난이도를 더욱 쉽게 인식했다고 합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질수록 부정적인 감정의 강도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죠. 이처럼 상대가 나와의 대화를 감정의 배출구로 쓰려 한다면 “내일 일정 때문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해.”,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 등 핑계를 만들어서 일단 그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당분간 만남의 횟수를 줄이거나, 가족일 경우 집에서 독립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쩔 수 없이 대화를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잠시 화장실이라도 가서 감정을 환기할 수 있는 ‘틈’을 만드는 게 좋습니다.


② 나의 욕구를 먼저 돌보기

현재 ‘나’의 심리 상태를 먼저 들여다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벗어나고 싶은 건 아닌지 세심히 살펴봐 주는 게 좋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상대도 자신의 욕구 해소를 위해 일방적인 대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보세요.

 

③ ‘받아주는 척’ 가장하지 않기

불편함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극적인 동조와 공감은 상대의 부적절한 행동을 부추길 뿐입니다. 화장실에 자주 가거나, 다른 화제를 꺼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나도 너와 같은 ‘N극’이며, 너만의 ‘S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표정과 행동으로 보여 주세요.

 

④ 자기 표현하기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끊임없는 불평불만에 불편한 감정이 올라온다면, 주저하는 마음이 들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 표현해 보는 게 좋습니다. A처럼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는 대신 용기 내서 말해 보세요. 말하는 게 어렵다면 달갑지 않은 표정이나 시계를 자주 쳐다보는 행동으로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고통스러워하고 있진 않나요? 반대로 여러분이 주변의 누군가에게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 건 아닌지요. ‘나’를 지켜주는 견고한 울타리가 건강한 관계의 열쇠임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조언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