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울증이 있을 때 우울한 기분을 일기로 남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요즘은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우울 계정'을 따로 만들어서 순간순간의 기분들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환자분들의 일기장이나 인스타그램 계정은 아픔과 상처로 가득합니다. 빨간색 글씨로 휘갈겨 쓴, '죽고 싶다'는 글귀를 볼 때면 저 역시도 마음이 시립니다. 감정이 그대로 실려 있는 낙서는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자신의 기분에 대한 기록은 우울한 사람들-우울증 환자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누군가 기록을 보고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구조 요청을 남기듯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때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기기도 합니다. 감정을 오롯이 담아낸 일기장은 아무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는 때에 유일한 친구이자 분신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이건 품고 있기 어려운 감정들을 밖으로 꺼내 보려는 쉽지 않은 시도였다는 점에서는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들은 종종 기분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곤 합니다. 부정적 감정이 가득 담긴 기록들은 다시 보았을 때 당시의 아픔을 생생하게 되살려냅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는지를 확인하며 재차 고통받습니다. 되새김질을 통해 섬세해진 감정은 더욱 아프게 나를 찌릅니다.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자책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산더미처럼 쌓인 감정 속에 해결책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제가 무척 좋아하는 초밥 만화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요리 경연 대회에서 기름기가 많은 생선 살을 모양이 잘 잡히게 잘라내는 과제가 출제됩니다. 요리를 위해 날카롭게 갈아서 준비해 온 칼은, 오히려 생선의 기름기에 미끄러져 버려서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 방해가 되죠. 주인공의 라이벌이 생각해 낸 답은 작두처럼 두꺼운 칼이었습니다. 생선 살의 기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두꺼운 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울한 감정에 대처하는 데에 이 장면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을 날카롭게 갈아 내고 내 기분의 원인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적어도 우울증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 날카로워진 감정은 나를 더 아프게 찔러 올 뿐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의 못난 점, 우울한 점들을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만드니까요. 이것은 자기 성찰과는 다릅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부정적 감정들을 재생산하는 것뿐입니다.

우울증이 있을 때 감정은 뭉툭하게 다룰 것을 권합니다. 오늘은 +1 이었다, 오늘은 -5 였다, 정도로 기분 변화를 알아볼 수 있게 기록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칼을, 감정의 구분을 날카롭게 준비할수록 우울증은 더욱 다루기 어려워집니다.

 

 

김재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으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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