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서대문 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4살쯤이었을까, 아이가 내게 물었다. 가족에 대한 그림책을 보던 중이었다.

 

“엄마한테도 엄마랑 아빠가 있었어요?”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엄마의 엄마 아빠야.”

“그럼 엄마도 나처럼 어렸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는 엄마의 엄마 아빠랑 같이 살았던 거예요? 아, 그래서 외할아버지네 가면 거실에 엄마랑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랑 같이 찍은 사진이 있는 거구나.”

 

자문자답하다가 깨달음을 얻은 듯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아이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그럼 외할아버지의 아빠네 집에 가면 외할아버지의 아빠랑 엄마랑 찍은 사진이 있어요? 그 집은 어디에 있어요? 우리는 그 집에 언제 갈 수 있어요?”

 

아이의 천진난만한 질문으로 시작했던 대화는 어느새 진지하고 근본적인 내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종종 아이의 순수한 의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을 다시 되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게는 이번 경우가 그러했다. 그림책 내용에서 시작되어 엄마 아빠, 가족에 대한 질문이 점점 설명하기 어려운 쪽으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의 엄마 아빠, 즉 조부모님을, 삶과 죽음을, 생명의 유한함을 어떻게 아이가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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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어 대충 무마하거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지 않기로 했다.

 

“외할아버지의 엄마 아빠는 하늘나라로 가셔서 우리는 만날 수가 없어.”

 

아이는 깜짝 놀랐다가 금세 슬픈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럼 외할아버지는 엄마 아빠가 없는 거예요? 그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요. 외할아버지는 매일매일 슬퍼서 어떻게 해요?”

“대신 한이랑 형아가 있잖아.”

 

삶과 죽음에 대해 어렴풋이 깨달은 아이는 한참을 품에 안겨 있었다. 이미 큰 아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경험이 있지만, 이러한 질문은 경험 여부와 관계없이 담담해지기 어렵다. 언젠가는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는 것, 생명은 유한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며 변하지 않는 진리다.

하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는 꺼내기 어려운 주제다.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동안 나 또한 위로가 필요했으리라. 아이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정보 전달이나 교육적인 차원과는 다르다. 언젠가 너와 내가 이별해야 할 순간이 온다는 것, 아직 인간의 숙명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너를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나 또한 죽음이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막연한 덩어리처럼 느껴져 왔다. 하지만 아이에게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직면해야 했다. 그제 서야 죽음 안에 ‘슬프다’와 ‘아름답다’는 반대되는 표현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삶의 유한함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언젠가 아이들 또한 성인이 되어 죽음이나 이별의 순간에 두려움을 느낄 때, 살아있는 자기 자신과 다른 생명에 대한 존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를.

 

인간은 누구나 한정된 삶을 살다가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한 치 앞과 머지않은 미래만 내다보며 이를 잊고 살아간다. 현대 실존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K. T. Jaspers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라는 소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자로서의 나는 무한히 영속되겠지만 결코 실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죽음이 실제로 느껴지는 삶의 장면 장면마다, 우리는 삶을 더욱더 또렷하게 느낀다.

실제로 자살이나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닿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흥미로운 결과가 있었다. 죽음의 경계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 경험 이후, 삶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공통된 이야기를 했다. 삶이 명료해졌다거나, 삶이 자신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는 게 그것이다. 이로 인해 현실의 환경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삶이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은 개인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실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잊고 산다. 그 때문에 삶의 소중함까지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죽음이란 항상 삶과 함께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들이 많아진다면 삶이 소중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간다. 이는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 중요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곤 한다. 살아가는 과정, 그것을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삶을 소중하게 알아채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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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경계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들은 과거의 미숙했던 나를 너그러이 수용하고 현재에 집중했다. 무심코 지나가던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고, 이웃의 인사처럼 아주 사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이에 따라 지금 여기의 삶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충만한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사소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곧 치유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정신과 진료를 받거나, 산에 오르거나, 미루어두었던 악기를 옷장 깊숙한 곳에서 꺼내 배우는 등 정성껏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를 내었다.

외할아버지는 엄마 아빠가 없어서 슬프지 않을까 걱정하던 아이는 대화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가 우리를 맨날 보고 싶다고 하는 거였구나. 외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면 우리도 외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거예요? 내일 외할아버지가 오시면 슬퍼도 거긴 가지 말라고 말해야겠어요. 내일 내가 외할아버지를 안아줘야 하니까 지금은 엄마가 나를 안아주세요.”

 

‘나는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당신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와 같은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같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는 외할아버지를 안아줄 수 있고, 나는 아이를 안아줄 수 있다. 이는 현재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음의 경계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삶의 본질을 맞닥뜨리는 경험을 하고,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게 되었다. 아마도 아이는 처음으로 이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그날을 기준으로, 아이는 자신이 외할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고, 외할아버지와 함께하는 날을 더 기다리게 되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은 누군가와 나눌 때 위로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이뿐만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자신이 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소망하고, 도움 주는 방법을 익히면서. 생명에는 끝이 있다. 아이야, 생명은 끝이 있어 슬프지만, 끝이 있는 생명은 아름답단다.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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