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도 (1)

[정신의학신문 : 당산 숲 정신과, 이성찬 전문의] 

 

 

이번에도 아닌 것 같다.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만났다 싶었는데,
연락이 오지 않는다.
참다 참다 SNS로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도 오지 않고 아무런 반응조차 없다.
또 헛물을 켠 것일까?
나 혼자 김칫국부터 마신 걸까?
그러면 그 남자는 왜 나를 보고 웃었던 걸까?
왜 내게 관심 있는 것처럼 이것저것 캐물었던 것일까?
사랑은, 왜 꼭 나만 비켜 가는 걸까?
불안하다.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럽다.
이렇게 모태 솔로로 살다가 허무하게 늙어갈까 봐.

지금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도
다음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 심정이 이와 같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이 시간에도
나는 불안하다.
이 사람이 갑자기 내 곁에서 멀어져 갈까 봐.
헤어지자고 말하고 벌떡 일어서서 나가버릴까 봐.
걱정이 밀려든다.
왜 나는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도
혹시 이 사랑이 나를 비켜 갈까 늘 불안해하는가?


불안(不安)은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안정과 평화가 없거나 부족한 상태를 가리킨다. 정신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불안(Anxiety)이란 좋지 않은 일이 예상되거나 위험이 닥칠 것처럼 느껴지는 불쾌한 정동 또는 정서적 상태를 의미한다. 신체적으로는 심장 박동이 증가하고, 호흡이 빨라지며, 떨림이나 땀 흘림 혹은 설사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심리적으로는 무력감을 느끼거나 걱정이 많아지고,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등의 증상을 보인다. 특정 대상에게서 느끼는 공포(Fear)와 달리, 불안은 부재한 대상에게서 느끼게 된다.


사랑과 불안은 반대되는 감정인 것 같지만, 의외로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 느끼는 불안이다. 알콩달콩 연애하는 친구를 보면 너무 행복해 보인다. 소개팅에 성공해서 데이트에 여념이 없는 동료를 보면 마냥 부럽다. 늘 혼자인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언제까지 혼자 지내야 하나 원망스럽다. 내가 그렇게 모자라거나 매력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왜 사랑에는 이토록 숙맥인지 알 수가 없다. 불안하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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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누군가 친절을 베풀거나 호감을 보이면 그 사람이 내가 그렇게 찾던 인연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드디어 내게도 짝이 생겼다고 환호한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내게 베푸는 호의가 진심인지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내민 손을 덥석 잡는다. 거절하지 못한다. 거절할 수가 없다. 사랑에 오래 목말라 있던 내게 오아시스처럼 다가온 사람을 내칠 수 없는 까닭이다. 사랑에 대한 불안이 또 다른 불행을 낳을 수도 있다.


다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 느끼는 불안이다. 남들은 나와 연인을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워한다. 상대방도 내게 적극적이고 헌신적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좋고 그를 마음 깊이 사랑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안하다. 그가 나에게 잘해줄수록 더 불안하다. 곧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그 사람이 나를 떠나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밀려온다. 어쩌다 전화 통화가 되지 않거나 한동안 연락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생긴 건 아닐까 좌불안석이다. 아무 일도 없고 그는 한결같지만, 내 마음은 늘 불안하다.

이럴 때 작은 실수나 사소한 오해가 발생하면 상상 이상으로 일이 커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평소 누적돼 있던 불안이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식으로 확신을 일으키며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나 있지도 않은 허무맹랑한 일도 불안한 마음을 자극하면 사실이라고 믿기에 이른다. 불안한 마음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는 커플이 엉뚱한 일 때문에 어이없이 헤어지거나 돌이킬 수 없는 다툼을 벌인다. 근거 없는 불안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불안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정한 불안을 느끼며 산다. 전혀 불안하지 않다면 이 또한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불안이란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의 하나다. 불안은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몸과 마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를 감지하여 예방할 수 있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적당한 불안은 일의 효율을 높이고, 동기와 의미를 부여해주기도 한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부족한 사람들은 위험한 상황에 둔감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불안이 과도해지면 생활 자체가 어려워진다. 일상 속에서 심각하게 불안을 느끼는 것은 정신 질환이다. 이를 불안장애(Anxiety Disorder)라고 한다. 다양한 형태의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일상생활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불안장애 환자는 보통 사람들보다 쉽게 과도한 불안을 느끼고 거기서 헤어나질 못한다. 모든 것이 불안하다. 불안한 감정을 떨쳐내려고 안전한 상황에 집착하면서 많은 것을 포기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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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 봐 불안을 느끼는 건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불안이다. 나만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불안하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불안하다. 앞으로도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나타날 것 같지 않다. 내가 사랑에 빠질 대상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래서 우울하다. 그래서 암울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오해이고 자학이다. 세상에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받고, 사랑할 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랑은 우연히 이루어지고 두 사람의 헌신으로 완성된다. 몸과 마음에 여러 결함이 있는 사람들도 다 사랑하며 산다. 이력과 스펙이 별것 없는 사람들도 다 가정을 이루며 산다. 내 매력을 온전히 바라봐 줄 사람이 머지않아 나타날 것이다. 내가 진정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조만간 내 눈앞에 등장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까 봐 불안을 느끼는 건 기대가 너무 크고 불확실성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하늘에서 백마 타고 내려온 왕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바닷속에서 육지에 잠깐 다니러 올라온 인어공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상대방을 과도한 상상 속에 가두어두면 내가 현실을 망각하게 된다. 당연히 미래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나와 똑같은 인격체로 바라봐야 한다. 두 사람이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사랑의 온도를 맞춘다는 건 단순한 것 같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온도가 너무 높으면 내가 차가운 온도로 적절히 낮춰줘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온도가 너무 낮으면 내가 뜨거운 온도로 적당히 높여줘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 사랑의 온도가 너무 낮거나 높을 때 이를 제대로 맞춰줄 수 있는 상대가 좋은 사람이다. 내 온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서로 온도가 다르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면 온도가 맞을 리 없다.


‘사랑과 사람으로부터 상처 받은 당신에게’라는 부제를 단 윤글 작가의 에세이 『나는 너의 불안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어』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불안에 대한 매력적인 처방이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저마다 다른 온도로 이루어진 마음 들일 텐데 그러한 두 진심이 함께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기준점이 있을 수 있고 답안이 있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나중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너는 꼭 너의 연애를 했으면 좋겠어. 주변 사람들로 인해서 흔들리지 말고 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과 체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애틋하게 풀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 네가 써 내려가는 것들이 어림없는 오답이 아니니까. 자신 있게 너의 멋대로 사랑하려무나. 아주 근사하고 태가 나도록. 그래, 가장 너답게.”

 

아무 근거 없는 불안에 휘둘리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있지도 않은 불확실성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나에게 맞는 연애를 하자. 내 식대로 사랑을 하자.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로맨스를 만들자. 그것이 정답이다. 근사하게, 본때 있게, 나답게 사랑하자.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인하대학교병원 전공의
(전)수도군단 의무실장.아산정신병원.다사랑중앙병원 진료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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