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빛나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현재 편입을 준비하고 있는 25살 수험생 여자입니다.

저는 고3 때 지속성 우울장애로 진단받았습니다.

제 생각에 저의 우울증은 일상생활은 정상적으로 가능했기에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14살에 시작돼서 최근까지 오랫동안 겪어왔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서야 정말로 우울증이 없어지고 정상이라고 느끼고 제 꿈을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데, 예전과 달리 학습내용을 자꾸 까먹고 학업에 어려움을 느껴서 혹시 오래된 우울증으로 인해 인지기능이 많이 떨어졌는지, 또 떨어진 인지기능이 회복될 수 있는지, 회복에 도움이 되는 방법들이 있는지 궁금해서 사연을 올리게 됐습니다.

 

우울증 이전에 저는 활발하고 친구들과 잘 지냈고 공부도 곧잘 하고 호기심이 많고 행복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6학년 가을쯤, 친구들과의 갈등, 학업 스트레스, 부모님의 무관심 등이 겹치면서 갑자기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단순히 우울한 것이 아닌 확실히 뭔가 심각하게 달라졌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때 아마 우울증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우울하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고, 그래서 저도 그냥 제가 이상한 거고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중학생이 된 후 저는 점점 더 우울해졌고,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내려고 하였고, 불면증이 생기고, 잘 읽히던 글이 난독증처럼 안 읽히고, 공부는 잘했지만 성취감도 없고 자존감은 바닥이었고, 항상 제가 가장 못나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해도 한해 한해 우울증이 지속되며 점점 나빠진 것 같습니다.

가끔 부모님께 이런 어려움에 대해서 말했으나, 부모님은 제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였고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저조차도 어리고 잘 몰랐고 그저 제가 이상한 거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된 치료를 제 때 못 받았습니다.

고등학교가 된 후에도 우울증은 계속 지속됐고 저는 잘하던 학업을 포기했습니다. 매일 우울함과 혼란 속에서 지냈고 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게 느껴지고 공부하는 게 점점 두려워졌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너무 어려웠습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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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후 저는 여전히 우울했지만 극복하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항공정비를 배우다가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를 이것저것 해보고, 컴퓨터도 배우고, 전문대를 졸업하고, 산업기사 자격증도 따고, 연애도 하고, 자취도 해보고, 취직도 했습니다.

우울함이 많이 나아지고 안정됐지만 오래됐기의 제 성격과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았고, 꾸준히 큰 우울과 불안이 찾아왔기에, 저는 이번 생은 이렇게 우울하고 불안하고 외롭게 살 수밖에 없다고 믿었고, 제가 예전의 낙관적이고 확신 있는 모습을 절대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상담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아마 제 우울증이 심리적인 문제도 있지만 생리적인 문제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올해 초부터 목표가 생겨 편입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공부를 해서 자꾸 까먹고 감을 못 잡곤 했지만 계속 꾸준히 하다 보니 점점 나아져갔습니다. 그래도 예전만큼 공부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게 잘 안되고 많이 더딘 것을 느낍니다.

최근에서야 정신과 치료를 통해 약물치료, 인지행동치료를 제대로 받고 스스로도 명상, 운동, 저널링을 하면서 증상이 많이 좋아졌고, 증상이 좋아지면서 갑자기 안되던 공부가 예전의 감을 찾아가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좋은 감정들이 느끼고, 이제야 완전히 우울증이 없고 정상이라고 느끼고 제대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계속 노력하고 좋아지긴 하지만, 예전만큼 공부가 수월하지 않고 더디고 공부한 것을 자꾸 까먹는 것 같아서 혹시 오랜 우울증 때문은 아닌지 과거의 무심했던 저와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좌절하곤 합니다.

물론 아직 20대 중반이고 일상생활에서 기억력으로 인해 딱히 문제는 못 느끼는데, 유독 공부가 조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울증이 한창 진행 중인 고3 때 웩슬러 지능검사 결과 전체 지능 121 정도 나왔는데 이제야 완전히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스스로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정말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오랜 우울증의 여파로 인지기능이 많이 떨어져 그것이 어려워질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다시 예전의 인지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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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빛나래입니다.

올려주신 사연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 본인의 문제를 통해 우울증의 중요한 부분을 잘 짚어주셨네요. 인지기능의 문제는 우울증이 좋아지고 나서도 우리의 수행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직업수행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로 다시 우울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존의 우울증 치료방법에 대한 연구들이 주로 주관적 우울감 등 기본적 증상에 초점을 두어왔기 때문에, 많은 환자분들이 기분 자체는 좋아지고 나서도 불편한 부분으로 기억력, 주의집중력 등의 인지기능 문제를 호소하시곤 합니다. 혼란스럽거나 멍 한 느낌, 기억력이 떨어지는 경험, 일이나 과제에 집중이 잘 안 되는 경우, 또는 명확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하는 것도 우울증의 인지기능 문제기도 해요.

사연자님은 증상을 겪으신지가 오래되었지만, 다행히 적절히 치료를 받는 용기와 함께 명상과 운동, 공부를 병행하시는 것으로 봤을 때 어찌 보면 치료의 모범사례이실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남아있는 인지기능 문제로 고민이시니, 제가 두 가능성으로 나누어서 설명드리려 해요.

 

첫 번째, 생물학적 원인으로서의 우울증 가능성이에요.

우울증이 단순한 기분의 저하가 아니라 뇌 기능을 떨어뜨리는 질환이라고 할 때, 그 결과로써 인지기능의 저하를 겪을 수가 있는 것이죠. 원래 우울증의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기 때문에 한쪽의 원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성인이 된 이후에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며 노력을 하는데도 우울감이 성격과 삶의 일부처럼 느껴진다고 하셨고, 상담치료보다는 약물치료와의 병행이 더 효과적이었고, 사연자님 스스로도 생리적인 문제를 고려하는 점, 마지막까지 남은 증상이 인지기능 저하인 점 등으로 생물학적 원인의 비중이 높은 건 아닌지 추측해볼 수 있어요.

당연히 사연자님을 진료하고 있는 주치의 선생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고, 이미 그런 문제를 고려하셔서 상담과 약물처방을 해주고 계실 가능성이 높아요. 우울증의 인지증상 개선 효과에 연구가 좀 더 많이 된 약물이 있기는 하지만, 환자 개개인에 대한 약물의 적응증이나 내약성은 어디까지나 주치의 선생님이 판단하시는 게 적절하므로,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시기를 권유드려요.

기억하셔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변화가 가역적이라는 것, 즉 좋아질 수 있는 부분이라는 거예요. 많은 분들이 변화의 속도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임의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기존의 지적능력, 현재 치료를 잘 받고 계시는 점 등 사연자님의 잠재력으로 볼 때,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수는 있겠지만 꾸준한 약물치료와 기타 치료의 병행이 인지기능의 회복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져요.

 

두 번째, 공부하는 과정과 시험 결과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동반되어 있을 가능성이에요.

우울증이 뇌 기능을 떨어뜨리며 인지기능의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우울이나 불안 등 감정상태 자체가 기억력이 떨어진 것처럼 느끼게 하기도 해요. 예를 들면, 마음이 불안하고 긴장이 많이 된 상태에서는 기억을 등록하는 것부터 잘 안 되기 때문에 막상 정보를 인출할 때에는 기억력이 떨어진 거라고 생각될 가능성도 있어 보여요.

일상생활에서는 기억력으로 인한 문제가 없으신 것도 하나의 근거가 돼요. 올해 초부터 편입을 준비한다고 하셨는데, 성인기의 학업과 취업, 독립 이슈는 우리가 꼭 겪어야 할 과제다 보니 그 결과가 어찌 될지가 참 막막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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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자님의 글에서도 느껴지듯이, 장기간의 우울증으로 인한 인지기능 저하가 비가역적인 후유증처럼 남을까 봐 우선 염려가 되시는 것 같고, 글에서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우울증 때문에 남들보다 출발점이 늦다는 생각을 하시는지도 모르겠어요.

오랜만에 공부를 시작하시긴 했지만 꾸준히 하며 점점 나아지는 상황이니까 과거 자신과의 비교를 너무 많이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편입 공부가 객관적으로 누구에게나 어려운 공부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이고요. 오히려 우울증이 한창이던 때에도 전체 지능은 높게 측정되었다 하셨는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치료를 잘 받으면 회복이 될 수 있는 문제이니까 이에 대한 걱정이 컸다면 마음을 좀 놓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지나간 장기간의 우울증과 그 결과에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현재의 불안감을 잘 인식하고 조절하는 것이 앞으로의 관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동의가 되신다면 꼭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해 보세요. 사연자님의 지적 잠재력뿐 아니라 변화에 대한 의지와 치료에 대한 순응이 보이는 만큼, 좋은 결과가 언젠가 나타나리라고 믿고 응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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