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를 진료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환자의 보호자를 꼭 만나 뵙게 됩니다. 환자의 자녀가 보호자가 될 수도 있고 또 배우자가 그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간혹 보호자로부터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아들: 선생님, 어머니가 진료를 오시면 집에서보다 훨씬 말씀을 잘 하시는 것 같아요.
의사: 설마요. 집이나 진료실이나 마찬가지일텐데요.
아들: 선생님이 관심도 보여주시고 또 몸이랑 마음이랑 어떤지 이것저것 여쭤보아 주시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병원에 오시면 마음이 편해져서일 것 같아요.
의사: 어머니의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감정이나 몸의 느낌을 파악하시는 능력은 아직 좋으신 편입니다. 앞으로는 대화의 주제를 어머님의 정서(마음)에 맞춰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오늘 집에 가시면 “어머니,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여쭤보는 것부터 시작해주세요.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들도 주변의 분위기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일 수 있습니다. 젊은 남녀만 분위기를 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이번엔 위의 사례와 정반대의 경우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딸: 선생님, 우리 아버지가 진짜 치매환자 맞나요?
의사: 무슨 말씀이세요? 벌써 약물요법 시작한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요.
딸: 저는 우리 아버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저랑 계실 때는 그렇게 횡설수설하시면서 어제 노인장기요양보험 검사하시는 분들이 집에 오셨을 때는 얼마나 질문에 답을 잘하시던지 깜짝 놀랐어요. 이런 게 가능한가요?
의사: 아마 아버님께서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을 하셨을 것 같아요. 낯선 사람들이 와서 검사를 하니 내가 여기서 틈을 보이면 큰 일이 날수도 있겠구나 하고 본능적으로 대처를 하셨을 겁니다. 필사적으로요.

 

치매는 기억력을 포함하는 인지기능의 저하가 나타나는 질병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뇌기능의 저하가 전체 영역에서 순식간에 나타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알츠하이머병은 물론이고 일부 혈관성 치매에서도 수년간 점진적으로 인지기능의 저하가 나타납니다.

 

시간이 있습니다. 치매가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서로 정(情)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치매가 진단되었다고 모든 것이 절대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치매 진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치매는 나를 잃어버리는 병이다, 노년기에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나는 암보다 치매가 더 무섭다."

 

환자의 주변 사람들은 치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치매가 진단되면 환자는 앞으로 우리를 전혀 기억하지 못 할 것이고,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치매 환자는 기억을 못하니 괜찮겠지만 가족에게는 가장 힘든 병이다)" 라고.

 

이렇게 되면 환자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치매에 대해 패배주의 또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치매 환자에 대해서 어떤 기대나 존중 혹은 배려가 없어지고, 오직 연민과 무관심의 덫에 빠지게 됩니다.

 

치매의 초기 및 중기 단계에서는 환자의 기분 및 신체감각이 인지기능에 꽤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치매 환자도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향긋한 차 향기가 나는 방에서 여가를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어제 본 TV 드라마의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으시겠지만, 가요무대에서 나오는 옛 노래의 감흥에 빠져들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정서적인 편안함 그리고 시각, 청각, 촉각, 미각 등 다양한 신체감각에 대한 적절한 자극은 부족한 인지기능을 보완하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저희 할머니는 우리 식구들로부터 참 구박을 많이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먼 동네 어느 육교에서 경찰에게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식구들은 할머니에게 이렇게 애원을 했습니다. “왜 자꾸 돌아다니세요? 그거 팔아서 얼마나 남는다고 그 고생을 하세요?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흉보겠어요. 다 늙은 어머니를 고생시킨다고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 제발 이제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 때 저희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셨습니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때만해도 이게 병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저 노망(老妄)이라고 온 식구가 속수무책으로 허탈해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의사가 되어 과거를 돌아보니 한 평생 시장에서 장사를 해 오셨던 우리 할머니는 치매를 앓으시면 서도 손수 바느질을 해서 그 보자기를 팔러 다니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할머니와 시장 놀이를 하면서 보자기도 팔아드리고 용돈도 그 두 손에 꼭 쥐어드리고 싶습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이런 보자기를 더 좋아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만들어 보시면 좋겠다고 오순도순 이야기도 나눌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치매가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서로 정(情)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치매가 진단되었다고 모든 것이 절대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동훈
의학박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제주 슬하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노인정신건강 인증의 및 정보의학 인증의
한국 EMDR 협회 공인치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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