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제목만 보면 꽤 귀엽게 느껴진다. 정말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려나,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여느 드라마 장르에서 기대하는 흥미롭고 잔잔한 킬링타임용 인간 서사와는 조금 다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가면 너머,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주인공은 서른 살의 우편배달부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날, 주인공 앞에 주인공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악마가 찾아온다. 그는 주인공에게 수명을 하루씩 늘릴 방법을 알려준다. 주인공이 하루를 더 사는 대신, 세상에서 어떤 것이든 한 가지 없애자는 게 그것이다.

1일, 세상에서 전화가 사라진다.

2일, 세상에서 영화가 사라진다.

3일, 세상에서 시계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날, 세상에서 고양이를 없애겠다고 한다.

 

사진_네이버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스틸컷
사진_네이버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스틸컷

 

세상에 물건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것들 중 고작 하나 씩의 물건을 없애면서 자신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하지만 그 물건과 함께 자신의 소중한 기억마저 함께 사라진다면 과연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1일, 세상에서 전화가 사라진다. 주인공은 잘못 걸려온 전화를 계기로 만날 수 있었던 첫사랑과의 추억을 잃는다.

2일, 세상에서 영화가 사라진다. 영화광이었던 가장 친한 친구와의 추억을 잃는다.

3일, 세상에서 시계가 사라진다. 주인공이 서른 살까지 살아온 시간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다음 날, 세상에서 고양이를 없애겠다고 한다. 고양이는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겨 있는 존재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이루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을 악마라고 말한 그 사람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지는 게 괴롭나?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가장 소중하잖아.”

 

기억은 죽음에 비해 가볍게 보인다. 죽는 것보다 기억을 하나씩 잃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중한 기억도 마찬가지일까. 영화 속 주인공은 사물로 대표되는 ‘소중한 기억’이 삭제되는 경험을 한다. 그 기억들은 자신을 채우고 있는 것들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소중한 기억을 오롯이 가지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보여준다. 물건과 동시에 주인공이 살아온 삶이 사라지는 걸 통해서. 즉,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기억은 지각부터 행동에 이르는 모든 뇌 기능의 일부다. 우리 뇌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억을 이용하면서 기억을 만들고, 저장하고, 수정한다. 우리는 생각, 학습, 의사 결정,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때 기억에 의존한다. 기억은 우리 정신생활을 하나로 엮는 접착제다. 그렇게 배운 것과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이게끔 만든다. 기억이 교란되면, 이 핵심적인 정신 기능들에도 문제가 생긴다. (에릭 칸델, 노벨상 수상자)

기억과 밀접한 질환으로는 치매를 떠올릴 수 있겠다. 치매 환자가 고통스러운 것은 평소 즐겨 쓰던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거나 평소 쓰던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찾지 못하는 불편함이 아니다. 치매 환자는 기억이 사라져서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당사자에게 진정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기억들이 사라지며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자아가 수많은 조각으로 해체되는 듯한 느낌, 자신이라는 존재감이 사라지는 듯한 그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라진 물건을 쓸 수 없어 불편한 게 아니라, 그 물건들로 인해 관계를 잃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_네이버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스틸컷
사진_네이버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스틸컷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

소중한 기억이란 어떻게 남는 것일까?

당신에게 작년 8월 12일에 뭘 했는지 묻겠다. 당신은 바로 대답할 수 있는가? 아마 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에 무엇이 가장 기뻤는지, 혹은 무엇이 제일 슬펐는지에 관해 물으면 머릿속에 기억의 한 장면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 것이다. 기억은 감정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길을 가다 무언가를 보았을 때, 그저 현재가 아니라 기억에 입각하여 함께 본다. 꽃을 보면 예전에 그 꽃을 함께 보았던 사람을 떠올리고, 그때의 기분을 상기하는 것과 같이. 소중한 기억을 남기는 삶은 자신에게 기억될 수 있는 삶이다.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주인공이 했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다면 누군가 슬퍼해 줄까요?”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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