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는 자들을 위한 치유의 방주(方舟)

유길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성모사랑 정신건강의학과

[정신의학신문 : 의정부 성모사랑 정신과, 유길상 전문의]

정신과를 찾는 환자들은 각자 다양한 사연과 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벼운 우울감과 공황장애가 가장 흔합니다. 자살 사고를 동반한 우울증,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이는 조울증, 피해망상과 환청 증상이 있는 조현병, 기억력 장애를 보이는 치매도 드물지 않죠.

소수의 환자들은 정신과 폐쇄 병동에 입원합니다. 주된 입원 사유는 자살 사고와 행동, 폭력성, 망상과 환각, 과소비 성향 등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릴 가능성입니다. 더러는 명확한 진단과 감정 평가를 위해 짧은 시간에 종합심리검사, 뇌 MRI 등의 검사를 받기 위해 입원하기도 합니다.

폐쇄 병동에 입원하면 세상과 단절되고 자유에 많은 제약이 생깁니다. 핸드폰과 컴퓨터를 쓸 수 없고, 가족이나 친구들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병동이라는 작은 사회에는 취침 및 기상 시간, 식사 시간, 약을 먹는 시간 등의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환자들은 이런 규칙과 제약 때문에 폐쇄 병동을 감옥이나 군대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입원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의료진도 환자분들이 얼마나 입원이 힘든지 충분히 알기 때문에 입원을 최소화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오랜 기간 저에게 조울증으로 치료를 받았던 시인 환자께서 시집을 내셨다고 책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이미 작가로 책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하신 경력이 있는 분입니다. 우울감, 무기력증 때문에 책 마무리를 하지 못해 한동안 힘들어하셨는데 이번에 드디어 시집을 발간하셨습니다.

책의 제목은 <그리운 173>입니다. 시인 환자는 몇 년 전, 조울증으로 대학병원으로 입원을 하셨습니다. 제목 <그리운 173>은 입원했던 폐쇄 병동 병실에서 따왔습니다. 환자는 입원 중 느꼈던 복잡한 감정과 다양한 경험 등을 산문시 형식으로 엮어내고 있습니다.

정신과 질환 진단 코드는 F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입원 중 만났던 우울증, 양극성 장애, 알코올 사용 장애, 망상 장애, 강박장애 환자들을 F32, F31, F10, F22, F42 등으로 명명한 했는데 저는 이 발상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시인은 심한 공격성과 폭력성을 보이는 환자들이 격리실 (Seclusion Room)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변한 모습을 보며 삶의 무기력감, 유한함, 허무함을 느낍니다. 저 또한 한 인간으로서, 환자들이 격리실에 들어가기 전의 처절한 저항과 극도의 두려움에 공감했습니다. 또한 과거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때, 치료자로서의 환자분들께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없는 허무함과 좌절감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시집을 선물한 환자분은 시인이시고, 승려이시고, 불교 신문 주필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에는 화두, 좌선, 열반, 무소유 등의 불교 용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용어도 재밌게 사용합니다. 폐쇄 병동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단단한 방주(方舟)이고 간호사를 백의의 천사라고 표현했습니다. 폐쇄 병동에는 남자 간호사가 많은데 백의의 천사가 남자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고 합니다.

많은 제약과 규칙이 있는 폐쇄병동 입원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닙니다. 일부 환자는 그 경험이 너무 고통스러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슬프지만 폐쇄병동에 입원한 것도 삶의 일부분이겠죠. <그리운 173> 시집을 낸 환자분도 인간으로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수용하고 성숙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아마도 폐쇄 병동에 입원하신 분들이 <그리운 173> 시집을 직접 읽어보신다면, 정말 많이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혹은 삶에 대해 차분하게 한 번 관조하고 싶은 분들에도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