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김인수 전문의] 

 

이 영화는 천재 수학자 존 내쉬의 일생을 다룬 영화로, 망상을 지닌 조현병 환자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가는지 보여주고 있다. 망상을 경험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망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걸까?

 

사진_네이버영화
사진_네이버영화

 

훗날 “균형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쉬는 프린스턴 학부에 입학할 때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젊은 시절부터 천재 수학자로 유명하였던 그였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때때로 갑작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언행들을 하여 어딘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달고 다녔다.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인간관계에서 오해를 자주 사기도 하고, 이성을 대할 때는 더욱 서투르게 행동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대학시절부터 이미 내쉬는 환시와 환청을 경험하고 있었다. 내쉬는 여러 가상의 인물들과 대화를 하였는데 첫 번째로, “찰스”라는 가상의 룸메이트였다. 찰스는 소심하고 경직된 내쉬와 달리 호탕하고, 유흥을 즐기는 외향적인 성격의 남자로, 내쉬는 찰스와 대화를 하며 연구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두 번째 인물은 “윌리엄 파처”라는 가상의 미국 정부 요원이다. 내쉬는 윌리엄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소련의 비밀 암호를 풀어내는 임무에 투입되었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사무실을 잡지, 신문들에서 오려 낸 자료들로 도배를 하고 그 자료들로부터 암호 해독의 열쇠를 찾아내려 매진하였다. 망상이 점차 체계화됨에 따라 소련 스파이들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믿음까지 형성되어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면 경계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인다.

망상을 겪고 있는 사람이 정신과에 찾아왔을 때 정신과 의사가 꼭 확인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검증력(Reality testing)의 유무이다. 현실검증력이 있다는 것은, 쉽게 말하여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으며, 제대로 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현실검증력이 없는 사람은 똑같은 현실의 자극들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었을 때, 그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망상이 형성될 수 있다. 애초에 다른 종류의 자극(환시, 환청 등)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한 경우에도 망상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체로 망상을 경험하는 사람은 특정 환경 속에 처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는 추론 과정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내쉬가 어떻게 망상을 발달시켰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고 있으나, 이러한 이론을 기반으로 영화 속 존 내쉬의 망상이 어떻게 형성되었을지 추측해보자.

첫 번째 가설을 세워보자면, 영화에서 나타난 내쉬의 망상은 일차적으로 환각으로부터 기인했을 가능성이 있다. 내쉬는 먼저 찰스, 윌리엄의 존재를 환시, 환청의 형태로 경험하였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특정 내용의 망상들을 발달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내쉬는 평소 좁고 폐쇄적인 인간관계만 맺고 살았던 터라, 이렇게 형성된 망상을 실제 현실과 대조해볼 기회도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망상은 더욱더 정교하고 체계화되고 견고해졌을 것이다.

 

사진_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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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가설로는 내쉬의 머릿속에서 진행된 논리적 오류에서 발단되었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조현병 환자의 망상을 외부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번에 치부할 수 있겠지만, 망상을 겪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 내용은 나름의 논리와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정신과 의사가 망상을 지닌 환자들과 면담을 했을 때 드러나기도 한다. 내쉬의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은 흐름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소련스파이들은 미국의 중요인사들을 암살하려 하고 있다”

“나는 미국 수학계의 중요인사이다”

“소련스파이들이 나를 암살하려 한다.”

이처럼 언뜻 봤을 때는 논리성이 있어 보이나, 불완전한 전제(A, B)에 기반한 논리구조, 즉 삼단논법 오류(Syllogistic fallacy)의 함정에 빠져 망상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내쉬는 소련의 스파이에게 감시당하며 쫓기고 있다는 망상을 호소하며 30대부터 20여 년간 정신병동에 입퇴원을 반복한다. 내쉬는 오랜 시간 망상에 시달리지만, 배우자, 친구들, 담당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점차 망상과 현실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가상의 인물인 크리스, 윌리엄의 존재를 계속하여 환시의 형태로 경험하지만,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무시하며 본인에게 주어진 삶, 즉 대학 교수, 남편, 아버지의 역할에 집중하며 현실과의 접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아내가 내쉬를 대하는 모습은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탁월한 임상적 개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망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동을 느끼는 내쉬의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며 “이게 진짜야, 이게 현실이야”라고 말하면서 내쉬가 직접적으로 현실감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사랑하는 아내의 존재 자체가 내쉬에게는 의심할 필요 없는 절대적 현실인 것이다. 내쉬는 믿을 수 있는 아내,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를 구심점으로 하여 가정생활, 대학 교수 생활을 꾸준히 이어나가며 현실감을 유지하고, 망상들을 멀리할 수 있었다.

 

존 내쉬처럼 조현병을 겪는 사람들의 망상은 설득으로 교정되기 힘들다. 따라서 주된 치료 또한 정신치료적 접근보다는 항정신병약물의 투약이 선호되고 있고, 현재까지 제일 효과적인 치료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망상을 겪는 사람들이 단순한 증상의 해소뿐만 아니라, 다시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화 속 내쉬의 주변 사람들이 해주었던 역할처럼 끊임없이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며, 공동체에 소속되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지지적 기반이야말로 망상과 구별되는 단단한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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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선생님 글을 만났더라면 좀더 빨리 우울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글 내용이 너무 좋아 응원합니다. 사소한 관계의 행복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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