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17)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생존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기업은 기업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해야 합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 대열에서 뒤처지거나 낙오하면 다시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쓰러질 때까지 달려야 합니다. 지금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루 24시간이 근무 시간인 셈이죠. 

이렇게 매일 같이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다 보면 실제로 다 타버려 소진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계속 누적되어 불안, 무기력증, 자기혐오, 분노, 의욕 상실 등에 빠지는 증상을 가리킵니다. 일 중독에 이른 듯 정열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피로감을 호소하면서 무기력해지는 것이죠. 목표와 포부 수준이 지나치게 높고 매사 전력을 다하는 성취욕이 많은 사람에게서 주로 발생합니다. 작은 성냥이든 커다란 장작이든 불에 활활 타오를 때는 빛을 발하면서 뜨겁지만, 다 타서 없어지고 나면 한 줌 재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번아웃 증후군을 소진 증후군, 연소 증후군, 탈진 증후군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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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빠서 일에 치여 살다 보니 번아웃 증후군에 이르게 된 현대인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시가 있을까요? 철학자 스타일의 정현종 시인이 쓴 시 한 편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정말 바쁘지는 말고

  바쁜 듯이.

  그것도 스스로에게만

  바쁜 듯이.

네, 시인의 표현이 참 절묘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 바쁘지는 말고 바쁜 듯이 살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바쁘지만, 바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바쁨에 치이지 말고 자기중심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바쁘다는 건 어찌 보면 행복한 고민일 수 있습니다. 20대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거나 매일 이력서를 들고 구직활동에 나서거나 아예 취직을 포기한 채 캥거루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매일 출근할 일터가 있고, 주어진 업무가 있다는 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생각하면 바쁘다는 게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너무 바빠서 힘들고 정신이 없을 때, 문득 일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 나를 미소 짓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겁니다.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면 대략 제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아무 생각이 없거나 괜스레 우울해진다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겠죠. 바쁜 듯이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오롯이 지켜 가는 것, 이것이 시인이 말한 ‘정말 바쁘지는 말고 바쁜 듯이.’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반전이 있습니다. 시인은 스스로에게만 바쁜 듯이 살라고 말합니다. 이건 또 무슨 뜻일까요? 다른 사람을 바쁘게 만들지도 말고, 자신이 바쁜 것처럼 보이지도 말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남들을 바쁘게 만드는 것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일자리를 만들어 바쁘게 일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좋은 일이겠죠. 하지만 이유 없이 또는 과도하게 닦달하고 채근하고 윽박지르고 괴롭혀서 바쁘게 만든다면 나쁜 일이겠죠.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여유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넉넉하면서도 여유 있게 그렇게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분주함으로 타인이 여유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가한 시간이 드디어

  노다지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느긋하게 바쁜 듯이.

바쁘게 사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쁘게 사는 겁니까?” 무슨 대답이 제일 많을까요?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니까요.” “자아실현을 위해서죠.”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일합니다.” 물론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대답은 이런 것 아닐까요?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거죠.”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발버둥 치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면 너무 비참하겠죠. 내가 좋아하는 일, 즐겁고 보람 있는 일, 남들을 이롭게 하는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먹고산다면 일하느라 바빠도 조금은 덜 힘들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말한 ‘느긋하게 바쁜 듯이’의 속뜻입니다. 바쁘지만 느긋합니다. 좋아하는 일, 즐거운 일, 보람된 일, 가치 있는 일, 이타적인 일을 하게 되면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몸은 천근만근이 되더라도 마음은 날아갈 듯합니다. 정신은 영롱하고 해맑습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사람들에게 해악이 되는 일을 하느라 바쁘다면 행복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렇게 일하다가 잠깐 휴식하거나 휴가를 내거나 망중한을 즐긴다면 그 시간이 곧 노다지입니다. 노다지는 잠깐 맛보는 겁니다. 늘 곁에 있다면 노다지가 아니죠. 바쁘다가 어쩌다 한번 맞는 한가한 시간, 그것이 노다지입니다. 나중에 은퇴해서 언제나 한가한 시간을 누리게 되면 그건 노다지가 아닙니다. 젊었을 때, 바쁠 때, 지쳤을 때, 힘들 때 봄바람처럼 불쑥 찾아온 한가한 시간이 노다지입니다. 한가한 시간을 노다지처럼 맞이해 즐기기 위해서는 평소 시인의 말처럼 느긋하게 바쁜 듯이 살아야 합니다. 

쫓기듯 아등바등 살다 보면, 목표에 매진하느라 과하게 집착하다 보면, 소유에 눈이 멀어 욕심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이 점점 타들어 가다가 재가 되고 있을지 모릅니다. 도덕과 윤리의 토양 위에 자본주의가 접목된 게 아니라 우리나라처럼 생존과 욕망의 토양 위에 자본주의가 이식된 나라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긴 노동 시간에 비해 짧은 휴식 시간과 강도 높은 노동 등 사회적인 요인도 번아웃 증후군을 부추기는 원인입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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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증후군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쉼이 필요합니다. 몸도 쉬어야 하고, 마음도 쉬어야 합니다. 먹고사는 일, 돈 버는 일 참 중요하지만, 잠시 멈춰야 합니다. 내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살아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잠깐 휴가를 낼 수도 있고, 얼마간 휴직을 할 수도 있겠죠. 이게 어렵다면 정시 출퇴근하면서 야근이나 밤샘 근무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말에 일하는 것도 금물입니다. 

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잘 맞는지, 즐겁고 보람이 있는지, 일하는 동안 어떤 감정이 드는지,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는지 등을 잘 살펴야 합니다. 이상이 있거나 특이한 사항이 발견되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족이나 동료 등에게 이야기해서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심할 경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도움을 받는 게 좋습니다. 

별일 아닌 것으로 취급하거나 무신경하게 넘어가면 증세를 더 키울 수 있습니다. 내가 나약해서 그렇다는 둥 요즘 스트레스가 좀 심해서 그럴 뿐 곧 좋아질 거라는 둥 엉뚱한 진단을 하면서 이를 잊기 위해 술과 담배에 더욱 의지하면 안 됩니다. 때로 스트레스를 이긴다면서 폭식을 하거나 과도하게 카페인을 섭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일탈 행위를 통해 번아웃 증후군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건강을 해치고 쾌락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번아웃 증후군에 빠지지 않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몰입이 있습니다.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 분야의 선구자인 미국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Flow)’을 강조합니다. 자기만족을 즐기기 위해서는 집중력 즉, 몰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일컫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혹은 하기 싫지만 먹고살아야 하니까 마지못해 일하다가 자신을 하얗게 불태워버리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일이 신나고 즐거워서 스스로 몰입하는 순간 일상에 새로운 행복이 찾아오고 삶이 변화된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몰입의 즐거움(원제: Finding Flow)』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직업에 애정을 기울이고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일벌레’로 보기는 어렵다. 일벌레는 일에만 미쳐서 다른 목표나 책임은 안중에 없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일벌레는 직무와 관련 있는 도전에만 응하고 일에 관계된 기술만을 배우려 드는 편협성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는 일이 아닌 다른 활동에서는 몰입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 소중한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고 인생을 초라하게 마감하곤 한다.” 

일에만 미쳐서 일벌레로 살다가 한 줌 재가 되어 없어질 것인가 아니면 몰입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일상을 풍요롭게 가꿔 갈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온전히 나의 몫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속에서 만난 고승과 선문답을 나누거나 꿈속에서 만난 노자(老子)와 철학을 논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정현종 시인의 짧은 시 한 편은 그 울림이 참 깊습니다. 

  정말 바쁘지는 말고

  바쁜 듯이. 

  느긋하게 바쁜 듯이.

 

 

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의도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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