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픽사베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가상현실을 통해 서로 다른 장소에 있어도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 마크 저커버그, 2016 Mobile World Congress 에서

2014년 페이스북은 가상현실(VR) 회사인 오큘러스를 2조원이 넘는 금액으로 인수했다. 매트릭스와 같이 영화에서나 상상할 법 했던 가상현실은 이제 우리의 일상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스마트폰만 있다면 이제 구글 카드보드처럼 채 10달러도 들이지 않고 가상현실로 풍덩 뛰어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에서 삼성 갤럭시 기어, 오큘러스 리프트 등은 이미 대중들에게 상당량의 판매량을 보이고 있고, 그에 맞는 가상현실 컨텐츠 시장도 활발해지고 있다. 2020년이면 가상현실 시장은 약 180조원 규모의 거대한 시장으로 거듭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러한 가상현실 컨텐츠의 개발과 활용에서 의료 부문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모의 수술 등을 통한 의학 교육, 가상 재활 치료 등 넓은 분야에 걸쳐 가상현실이 적용되고 있지만, 무엇보다 주목 받고 있는 분야는 정신건강의학 분야의 치료이다. 가상현실을 이용한 노출치료가 각광 받고 있다.

 

노출치료란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감정적 내성을 길러주는 일종의 행동 치료, 행동 훈련법이다. 특정 상황에서의 심리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계획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노출 시키는 치료로서 불안장애나 공포증 등에 오래전부터 활용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미 고통스러움이 조건화된 자극에 대한 노출은 그것에 대한 새로운 트라우마를 경험시켜줄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노출 치료에서는 체계적인 계획이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견딜 수 있는 수준의 적절한 노출을 조금씩 늘려가는 계획, 이른 바 가산모형을 통한 공포 위계의 설정이 가장 중요하다.

 

가상현실을 통한 노출 치료는 노출하고자 하는 상황에 대한 정밀한 조절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척 주목을 받고 있다. 치료자의 임의로 적정 수준의 노출을 단계적으로 설계하고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도한 노출로 인한 위험 상황에서 탈출이 무척 용이하기 때문에 현실 자극을 활용한 노출치료보다 훨씬 안전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저 가상현실 기기를 벗어버리거나 디스플레이를 꺼버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가상현실 노출치료가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는 영역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PTSD) 분야이다. 전쟁이나 교통사고 등의 외상적 상황에 대한 회피, 불안, 재경험의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점진적이고 계획적인 상황 노출을 통해 적응을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가상현실은 단순히 면담을 통해서 상황을 떠올리는 방식을 통해 외상 기억의 재처리를 하는 기존의 PTSD치료보다 훨씬 생생하게 환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최초의 가상현실 PTSD 치료로는 1997년 시도 되었던 “버츄얼 베트남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버츄얼 베트남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전쟁 PTSD에 대해 베트남전의 상황을 가상현실로 노출시키는 치료였다. 당시의 기술로서는 무척 조악한 수준의 그래픽이며 제공될 수 있는 전쟁 시나리오 종류도 무척 제한적이었지만, 참가자 전원이 유의미한 치료효과를 보여 정신의학계에서 큰 반응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래픽 수준이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PTSD 치료를 위해 트라우마를 떠올리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는 탱크와 사람들이 영상 속에 전혀 등장하지 않았지만, 치료에 참여한 환자들은 많은 경우 영상 속에서 탱크와 사람들을 보았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사진 버츄얼 이라크 http://archive.defense.gov/DODCMSShare/NewsStoryPhoto/2008-09/scr_hrs_20080925-D-3737K-001a.jpg

 

이후 2005년 이라크 참전 군인 PTSD 환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인 “버츄얼 이라크” 또한 상당한 치료효과를 보여, 2011년에는 미국 정부에서 이를 지원하여 “Brave Mind”라는 프로그램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브레이브 마인드는 현재 미국 전역 50개 이상의 병원에서 치료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어 사용 중이다.

국내에서도 연세대학교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2005년부터 가상현실 클리닉을 운영하여 ‘가상현실 인성 재활 시스템’을 적용 중에 있다. 각종 공포증이나 불안장애의 치료 뿐 아니라 조현병에 의한 사회 적응 훈련 등에도 가상현실이 좋은 효과 보이고 있다. 분당 서울대 병원이나 차의과대학 분당 차병원 등에서는 가상현실을 활용한 재활치료를 적용 중에 있다.

가상현실을 활용한 의료 산업의 사업들은 무궁무진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와 관련된 컨텐츠의 개발과 적용에 있어서도 큰 발전이 기대되고 있다.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가상 세계에서의 적응을 통해 현실 세계로의 적응을 적극적으로 돕게 될 것이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졌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가상현실이 차세대 플랫폼이 될거라던 불과 몇 년전의 전망은 이제 하루가 갈수록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단순히 오락용 유희거리를 벗어나 의료를 포함한 각종 통신, 전자 산업에 새로운 매체로 보급되고 있다. 후각과 청각, 촉각을 포함한 새로운 3차원 가상세계로의 탐험은 점점 진화하고 있다. 가상세계가 점점 현실과 분간하기 어려워질수록, 가짜가 점점 더 진짜에 가깝게 다가갈수록, 우리는 오히려 현실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주춧돌을 하나씩 더 발견해 나가기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처럼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힘을 많이 얻습니다. 정성스런 상담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에게 궁금했던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