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위대한 음악, 음악가 그리고 정신 의학 8.

[정신의학신문 : 려원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리고 너는 나의 강박관념, 뼈만 앙상히 남을 때까지 너를 사랑해.
그리고 애나는 삶을 엉망으로 만들지, 거식증의 나날처럼.

                                                                          Silverchair - Ana's song
 
* 본문의 인용구들은 Daniel Johns의 과거 잡지 인터뷰를 참조하였습니다.
영어 인터뷰 원문은 http://www.chairpage.com/_news/archive/1999/nov01.ht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호주 출신 그런지락 밴드 실버체어 Silverchair의 프론트맨 대니얼 존스 Daniel Johns는 다양한 정신과적 문제들과 씨름해왔습니다. 우울증, 불안증, 편집증적 증상, 자살사고, 그리고 거식증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통은 자기 고백과도 같은 노랫말들로 표현되었습니다. 그중 Ana's song은 거식증, 즉 신경성 식욕부진증 Anorexia Nervosa에 관한 곡입니다. (Ana는 Anorexia Nervosa의 속어로서, 여자 아이의 이름을 닮아 종종 의인화되어 회자됩니다.)

Silverchair 출처: http://www.mtv.com/crop-images/2013/08/22/silverchair_1377190649886.jpg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신경성 대식증, 폭식장애와 함께 섭식장애(식사장애)에 속하는 대표적인 질환입니다. 섭식장애란 음식을 먹는 행위에 이상을 보이고,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왜곡해서 평가하는 정신과적 장애를 뜻합니다. 즉 굶거나, 폭식 후 구토를 하거나, 과도히 운동을 하는 등 체중이나 체형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자신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이 신체 이미지를 매우 중요히 여기는 병이지요.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으로 저는 음식을 조금만 먹기 시작했어요. 하루하루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 스스로를 테스트한 거죠. 아무것도 안 먹는 날은 성취감을 느꼈어요. 만족스레 잠을 청할 수 있었죠.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게 남아있다는 느낌이 위안이 되었다고 할까요.
몇 달 사이에 저는 먹지 않으면 실신할 지경에 이르렀어요. 졸도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과일 한 쪽을 먹거나 수프 한 컵을 마셨죠.

  
인지행동치료적 관점을 가진 정신과 의사들은 섭식장애를 일종의 '인지장애'로 바라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삶에서 자신이 이룩한 성과 - 이를테면 학업 성적, 직업적인 성취, 인간관계 등 - 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에 비하여, 섭식장애와 씨름하는 사람들은 체중/체형이나 음식을 조절하는 능력으로 자신을 평가하려 듭니다.
 

그(의사)는 저를 앉혀놓고 얘기했어요: 그냥 손을 놓고 있으면, 저는 죽게 될 거라고요. 섭식 장애가 있을 때 일반적으로 보이는 징후들이 이미 제게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설명해 주셨죠. 벗겨진 잇몸이나 치아, 여기저기 튀어나와 보이는 뼈, 움푹 들어간 뺨 같은...

 
섭식장애, 특히나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때로 저체중, 무월경, 변비, 복통, 무기력감, 전해질 불균형, 체중감소, 탈수, 저체온, 저혈압과 같은 심각한 합병증을 초래합니다. 반복적, 의도적으로 구토를 하는 경우에는 치아부식, 이하선 비대, 손등의 흉터 Russel's sign 가 관찰되기도 합니다. 장기적으로는 기아, 자살, 전해질 불균형 등으로 인해 입원 경험이 있는 환자의 약 10%가 사망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경성 식욕부진증 치료 전후의 삽화, John Ryle, "Anorexia Nervosa", Lancet, Oct. 17, 1936. pp. 893-96 이미지 출처: http://wellcomeimages.org/indexplus/obf_images/3d/85/0dfba9a54f82c30868b4c58163ed.jpg

Ana's Song의 가사는...

내가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 알고자 하는 소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뭔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몸조차 가눌 수 없어진다는 점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섭식 장애를 초래하는 진짜 원인을 이해하지 못해요...

허영심이나 미적인 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실은 삶의 통제력을 찾고 싶은 겁니다.

저는 온통 삶의 어두운 면에 쏠려 있었거든요... 제 생각에 문제는 고등학교 시절에 힘든 일을 겪었던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아요.


섭식장애는 '독특한 식사 행동이나 자기 신체 이미지의 왜곡'으로 표현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테면 자존감의 저하, 우울이나 분노, 삶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막막함이나 주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불안감 등이 기저에 깔린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식이 조절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결핍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위험한 대안인 셈입니다.
 

사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어요. 투어 때 비춰지던 정신적 문제들이 완전히 불거져나왔고, 제가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은 완전히 왜곡되어 버렸어요. 처음에는 우울증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더 가지가 뻗어 나오더군요. 저는 굉장히 불안해졌고 편집증에 사로잡혔어요. 집을 벗어나기라도 한다면 뭔가 끔찍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죠.

 
섭식장애를 보이는 사람들의 다수에서는 기분장애나 불안장애가 공존합니다. 특히나 폭식을 하는 이들에게서는 우울 증상이, 식이를 제한하는 이들에게서는 불안 증상이 보이는 편입니다. 그 밖에도 강박적 성향, 완벽주의와 같은 성격적 특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Paint Pastel Princess이란 곡은 제 주치의가 처방해준 항우울제에 관한 은유입니다... 약을 먹으면 마음이 나아지거든요. 그것들을 평생 복용할 생각은 없지만, 현재로서는 제가 대처해나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섭식장애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내과적 문제가 심한 경우에는 입원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적절한 식사 습관을 위한 행동치료, 신체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삶의 목표를 새롭게 세우는 등의 인지치료, 가족 내의 갈등을 발견하고 치료에 가족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족치료, 그 밖에 항우울제 같은 약물치료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종종 재발하고, 만성화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주기적으로 진료 받고, 치료를 유지하는 일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최저점은 찍었고 이제 다시 오르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확히 어떤 부분이 문제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제가 신경쇠약에 걸린 것이라 얘기하지만, 남들이 뭐라고 한들 중요한 건 아니죠. 스스로를 위해 그걸 찾아내야 합니다.


섭식장애를 앓는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식습관을 감춘 채 은밀히 고통 받는 쪽을 선택합니다. 또한 증상의 심각성과 치료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니얼 존스는 대중 앞에서 용기 있게 자신의 증세를 고백하였고, 기꺼이 병을 인정하고 치료받기를 택했습니다.
인용한 인터뷰는 1999년 말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17여년이 지난 지금, 실버체어는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했지만 그는 여전히 음악 씬에 몸담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Teen People, November, 1999, Silverchair Frontman Daniel Johns Talks Openly about his Painful Battle with Depression, Anxiety and a Life-Threatening Eating Disorder by Daniel Johns as told to Michele Promaulayko
http://www.chairpage.com/_news/archive/1999/nov01.htm
Christopher G. Fairburm 저, 이정현 역, 섭식장애를 위한 강화-인지행동치료, 하나의학사

려원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국정신분석학회 정회원, 대한최면의학회 준회원
의식/심신문제, 정신분석적 이론의 신경과학적 검증이 주된 관심사이다.
번역서 <PHI: A voyage from the brain to the Soul>이 출간예정이다. 

 

 

려원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구 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수료
국립서울병원 (현 국립정신건강센터) 전공의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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