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위대한 음악, 음악가 그리고 정신 의학 7.

"자기 자신을 속이려는 거짓말이야말로, 가장 큰 소리로 말하는 거짓말이다." 

                                                                                  에릭 호퍼 Eric Hoffer
 
또 다시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나, B씨는 고민이 깊습니다. 일이 특별히 힘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업무 능력만 놓고 본다면 누구보다도 잘 해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문제는 동료들이 B씨를 거짓말쟁이로 간주하고 따돌린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현실을 직시하자면, B씨가 주변에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난 주말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느니, 휴가 때 화려한 해외 호텔에서 묵었다느니 하는류의 허풍을 B씨는 줄곧 늘어놓았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반응이 좋았습니다. 부러워하는 이들 사이에서 B씨는 잠시 동안 으쓱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발견한 동료가 추궁하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달라졌습니다. 곤란해진 B씨는 이를 덮기 위한 또 다른 거짓말을 연달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졌고, 이제 출근 때가 되면 B씨는 괴로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집에 있을 때 B씨는 개인 SNS 계정에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세하며 사진과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B씨의 행동은 어쩌면 타인에게 관심을 얻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는 B씨를 곤경에 빠뜨리게 만드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거짓말로 잠깐 얻었던 이득보다 훨씬 큰 손해를 입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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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출신 작곡가 '졸탄 코다이 Zoltán Kodály'의 작품 <하리 야노스 Háry János 모음곡>에서도 B씨와 비슷한 '하리'라는 허풍쟁이 노인이 등장합니다. 19세기 헝가리의 시골 술집을 배경으로 농민 하리는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놓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공주이자 나폴레옹의 왕비였던 마리 루이즈가 자신을 연모하였다는 둥, 화가 난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키자 자신이 용감히 격퇴하였다는 둥, 오스트리아 황제의 환대 속에 귀족이 될 뻔 하였으나 스스로 사양하고 공주의 구애마저 거절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내용이 6곡 내내 이어집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상상력이 풍부한 거짓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증상'은 오래전부터 정신의학자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공상 허언증 Pseudologia Fantastica, 과장벽 mythomania, 병적 거짓말 Pathological lying, 소망 정신증 Wish psychosis과 같은 다양한 용어로 불려 왔습니다.
하지만 이 증상을 바라보는 견해는 천차만별입니다.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이들은 자신의 거짓말을 거짓말로 인지하고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논리적 사고가 가능할까? 혹은 거짓말은 충동적으로 나오는 것일까, 어느 정도는 의식적으로 조절이 가능한 것일까? 등등, 학자들은 여전히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상 허언증, 병적 거짓말, 소망 정신증과 같은 용어들이 과연 동일한 증상을 지칭하는 용어이긴 한 것인지 조차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이견이 없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있습니다. 바로 거짓말의 성격입니다. 일반적인 거짓말은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거나, 처벌을 피하려 하는 등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반면 허언증에서는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모호합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이익은 미미한 수준이며, 오히려 허황되다는 평가를 듣기가 십상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정신의학자들은 허언증의 동기를 심리 내적인 (대게 무의식적인) 만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추측합니다. 즉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셈입니다.

지어낸 이야기는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어내어 잠시나마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수단, 다시 말해 '현실과 소통하는 백일몽'이 됩니다. 어떤 연구자는 허언증을 유발하는 심적인 동기로 자존감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 현실을 부정하고 억압하고자 하는 심적 방어기제, 소망의 충족 등을 들기도 했습니다.

 
작곡가 코다이는 작품 속 하리의 허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합니다.
하리의 이야기는 거짓말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그가 만들어낸 생생한 환상의 산물입니다. 그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상상 속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과장되고 불가능한 꿈을 꿉니다. 하지만 하리처럼 과감히 그 꿈을 표현할 배짱은 없습니다. 하리를 헝가리라는 나라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 이야기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담길 것입니다. 오직 꿈결 속에서나 가슴속 열망과 염원이 이루어질 법한 조국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거짓말같은 세상, 소망하는 바가 현실이 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이러한 백일몽은 지금 당장의 불만족이나 결핍, 고통을 극복해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며, 심적인 위안을 줍니다.
 
민족주의자 코다이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핍박 받던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 하리 야노스라는 허풍쟁이 영웅을 내세울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시대상을 극복하고자 한 염원이 빛나는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셈입니다. 소망하는 바를 마음속에서 그리는 공상은 자아의 통제 하에 놓여있기만 하다면, 삶을 발전시키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지어낸 이야기를 단순히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취급하고 넘길 것이 아니라, 화자의 마음속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 함께 헤아리려 노력한다면, 조금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다만 현실과 공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병적인 허언증은 결국 막심한 해를 초래하기에 반드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겠습니다.
 


참고문헌
Cheryl D. Birch et al. A review and case report of pseudologia fantastica, The Journal of Forensic Psychiatry & Psychology, June 2006; 17(2): 299 – 320
안동림 저, 이 한장의 명반: 클래식, 현암사


 

려원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구 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수료
국립서울병원 (현 국립정신건강센터) 전공의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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