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위대한 음악, 음악가 그리고 정신 의학 6.

 

"연주전의 긴장감과 무대 공포증은 음악인생 내내 저를 따라다녔지요."

77세의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A씨는 직장에서 승진한 이후부터 출근이 괴로워졌습니다. 매주 회의에 참석해서 부서활동을 보고해야 하는 일이 새로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말마다 보고 자료를 챙기고 있노라면 초조해져 옵니다. 과연 임원진들 앞에서 실수 없이 발표를 끝마칠 수 있을까. 중간에 곤란한 질문을 받지는 않을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들키지는 않을까. 목소리가 떨리기라도 해서 비웃음을 사면 어쩌나. 이런 저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내가 이러려고 승진한 것인가 자괴감마저 듭니다.

주말이 지나고 발표 시간은 다가옵니다. 앞선 연자들은 훌륭하게 보고를 마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프레젠테이션과 비교가 될까 덜컥 염려가 앞섭니다. 이제 A씨의 차례입니다. 전날 몇 차례 예행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사람들 앞에 서자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더듬더듬 자료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은 쿵쾅거립니다. 뒷목이 뻣뻣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A씨는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발표를 마쳤습니다. 타고난 달변가처럼 보이는 동료들 앞에서 오늘따라 유독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A씨가 겪은 증상은 사회불안의 한 형태인 수행불안 performance anxiety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상황에서 어떤 활동을 수행할 때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을 뜻합니다. 대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스포츠 경기에 참여할 때면 대개 누구나 긴장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과는 달리 다른 동료들은 타고난 달변가'라고 여긴 A씨의 생각은 왜곡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엄청난 인기를 얻은 인물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행불안을 느끼곤 합니다. 무대 커튼 뒤에서 남몰래 두려움에 떤 수많은 음악가들의 사연을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비틀즈 Beatles의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는 워낙 연주에 겁을 집어먹어 한때 밴드를 탈퇴하려고 했습니다.

두려움 따위는 좀처럼 느낄 것 같지 않은 헤비메탈의 산 증인 오지 오스본 Ozzy Osbourne은 2010년 자신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무대를 앞둔 상태에서의 긴장은 고통스럽기가 마치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만 같다."

블랙 새버스 Black Sabbath 시절까지 포함하자면 오지 오스본의 경력은 40년이 넘습니다. 수많은 공연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에게도 불안은 어김없이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Ozzy Osbourne이미지 출처: https://lh4.googleusercontent.com/-Cgnqt5z6Xw0/AAAAAAAAAAI/AAAAAAAAAbY/yUOrcq_xidI/s0-c-k-no-ns/photo.jpg

 

클래식 음악가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와 같은 거장들마저도 무대 공포로 고생했다고 하니 피나는 연습이나 월등한 기량으로도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나 봅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불안감과 싸우다 큰 희생을 치룬 이들도 있습니다. 락 음악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명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 Eddie Van Halen은 극심한 무대 공포를 이기기 위해 술을 찾았고 결국 알코올 의존증으로 고생해야 했습니다. 고(故) 에이미 와인하우스 Amy Winehouse의 경우는 더욱 비극적입니다. 술과 약물에 취한 채 오른 세르비아에서의 공연이 그녀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행 불안은 왜 찾아오는 것일까요?

불안은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흔한 감정입니다. 스트레스 상황이 닥치면 우리의 자율신경계, 특히 교감 신경은 저절로 활성화됩니다. 그 결과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지며, 근육들이 긴장하는 등 일련의 신체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나운 짐승과 마주쳤더라면, 이러한 준비 단계는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불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불안감이 적당히 존재할 경우, 일을 수행하는 능력은 오히려 더 향상될 수 있습니다. 1908년 로버트 여키스 Robert Yerkes와 존 도슨 John Dodson은 각성 상태와 과제 수행 능력 사이에 역 U자 형태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여키스-도슨 법칙)

 

출처: https://www.adelaide.edu.au/uni-thrive/revive/stress/

 

A씨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만약 프레젠테이션 시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A씨는 별다른 동기 부여 없이 대충 발표를 마쳤을 것입니다. 어쩌면 준비해간 내용을 충분히 꺼내놓지도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지나치지 않는 정도로, 적당히 긴장을 느낄 때 A씨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발표를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불안은 남녀노소 (심지어 숙련된 전문가라 할지라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간적인 감정임을 잊지 맙시다.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는 순간, 긴장하거나 불안을 느끼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어쩌면 이 불안감은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소망의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불안감을 완벽히 통제하거나 없앨 수 있는 마술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불안은 억누르려하면 할수록 더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감 신경은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체 반응이 생겼을 때, 이를 의지로써 없애려 노력한다면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실패한다면) 긴장감은 더욱 늘어나고 교감신경은 점점 더 활성화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요?

오히려 지금 느끼는 불안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면한 과제에 집중해 봅시다. 대중 앞에 선 당신의 긴장감이 그저 지금 임하는 일에 집중하라는 신호라고 여긴다면, 최소한 지금 느끼는 긴장감이 점점 더 증폭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지나쳐 업무에 심한 지장이 되거나 심적인 괴로움을 끼친다면, 정신과를 방문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인지행동치료나 약물치료와 같이 입증된 방법들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Debra A. Hope et al, Managing social anxiety: A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approach, Oxford university press

Steven C Hayes/Spencer Smith 저, 문현미/민병배 역,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학지사

Ozzy Osbourne, I am Ozzy., Grand Central Publishing

 

 

려원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구 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수료
국립서울병원 (현 국립정신건강센터) 전공의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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