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40대 초반 주부입니다. 현재 유치원에 다니는 남자아이가 있습니다. 

저는 6살 무렵부터 시작된 아버지와의 안 좋은 관계로 늘 삶의 존재 자체의 불안을 느끼며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신경정신과를 다니며 약을 복용했고, 두 차례 자살 시도로 인해 응급실에도 갔고, 30대 중반엔 두 달 가까운 시간을 양극성 정동장애로 입원을 했습니다.

그 후 결혼과 임신, 출산을 하며 병원에는 가지 않고 있지만, 산후우울증 증세로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아이를 보아 꾹 참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우울증을 절대 아이에게는 대물림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 보니 늘 몸과 마음이 지쳐 있습니다.

책에서 읽어보니 우울증도 유전이라 하는데 너무나 걱정됩니다. 저의 어머니도 30-40대 시절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셨고, 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끊지 못한 이 병을 제 아이가 갖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데 제가 마음먹는 대로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입니다. 

우울증으로 오랜 기간 고통을 받아오셨군요. 격려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텐데 지금까지 그 병마와 싸워 이 자리에 서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응원과 격려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질문자님께서는 우울증이라는 지독한 병과 맞서 싸울만한 충분한 저력을 갖고 계시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만큼 질문자님께서 견뎌오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견디고 있으실 그 괴로움 또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중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떨궈낼 수 없는 그 숙명 같은 괴로움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 괴로운 숙명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질문자님의 마음이 그래서 더 공감이 갑니다. 

 

분명히 우울증은 가족력이 있습니다. 우울증이 유전병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울증 부모를 가진 아이가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양극성장애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우울증에 비해 그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질문자님께 통계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울증이 가족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곧, 질문자님의 아이가 우울증의 굴레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다는 말과 동의어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사실을 깊이 꿰뚫어 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운명과도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 운명과도 같은 그 거대한 힘에 압도당하는 순간이 분명 있습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탓이겠지요. 

하지만, 정신의학에서는 운명 중에서도 특히, '자기예언적 운명'을 주시합니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려 오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분명 자기 예언적 운명과 좌절의 순간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충족시키며 예언을 완성시키는 운명의 굴레 말입니다. 

'나는 평생 불행할 거야' '나는 벗어날 수 없어'와 같은 독백은 스스로의 슬픈 운명에 대한 자조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의 인생을 그 운명에 가두는 자기 예언적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 선언이 곧 그 순간 새로운 운명이 되어 나도 모르게 나의 또 다른 가능성들을 차단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질문자님께서 걱정하고 계신 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우울증을 앓게 될지 아닐지는 질문자님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어느 정도 운명과도 같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해서, 그것이 곧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기예언적 운명을 깨닫고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6살 무렵부터 시작된 아버지와의 안 좋은 관계로 늘 삶의 존재 자체의 불안을 느끼며 사춘기를 보냈습니다"라고 이야기 주셨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질문자님의 아이가 조금 더 나은 운명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우울증과 꿋꿋이 싸워오고 버텨내며 자신을 품어낸 어머니, 그리고도 이렇게까지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만났으니 말입니다. 또, 그런 만큼 지금 질문자님에게는 아이가 더 나은 운명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줄 만한 시간과 여유가 아직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질문자님이 결코 우울증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게 된 게 아니듯, 아이가 우울증의 가족력을 갖게 된 것 역시 결코 질문자님의 탓이나 질문자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질문자님의 어머니에서부터 이어지며 운명처럼 거대해 보이는 그 큰 고통의 역사는 질문자님이 어찌할 수 있었던 무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굳이 우울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이의 인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우리의 아이가 그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내가 겪어온 고통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며 염려합니다. 충분히 염려하며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만큼 충분한 표현과 배려. 어쩌면 그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울증은 유전자만으로 결정되는 병이 아닙니다. 또 모든 우울증이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질문자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걱정과 불안에는 깊은 사랑이 깃들어 있음이 잘 보입니다. 그 사랑과 걱정 또한 아이의 인생을 이끌어갈 중요한 운명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운명이 있는 한, 앞으로 아이의 삶이 질문자님이 지금 스스로를 돌아보는 바와 같이 좌절로 점철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부디 질문자님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질문자님 가족에게도 더 많은 웃음과 행복이 깃들기를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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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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