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심리학과 만나다> (2)

올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다. 전 세계 내로라하는 음악가와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곡을 연주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러나 계획은 대부분 취소되었다. 코로나 때문이다. 코로나만 아니었더라면 2020년 클래식 음악계는 베토벤으로 뜨겁게 달궈졌을 것이다.

음악의 신, 악성(樂聖) 등으로 불리는 베토벤은 클래식 음악과 담을 쌓은 사람이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음악가다. 그가 남긴 명곡 중에 딱 한 곡만 감상해야 한다면 나는 제9번 교향곡을 고를 것이다. 그의 삶과 음악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까닭이다.
 

사진_픽사베이


제1악장은 고요 속에 시작된다. 이전 교향곡들과 분위기가 다르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작은 손짓 같은 음은 호른이다. 귀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느낌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황홀감과 신비로움이다. 비행 물체는 거대한 구름을 헤치고 어느 행성에 도착한다. 안도감에 마음이 평온하다. 베토벤은 음악을 지구에서 우주로,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겨 놓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악장은 뜨거운 열정과 해학 그리고 감미로운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다. 하늘을 날던 나는 어느새 땅에 내려와 있다. 인생에는 허다한 웅덩이와 가시덤불이 놓여 있다. 때로는 폭우도 내리고 눈보라도 친다. 하지만 햇살도 비치고 바람도 분다. 이에 자족하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게 인생이다. 내게 주어진 사랑과 내 앞에 놓인 평화가 내 삶이다.

제9번 교향곡이 베토벤 음악의 하이라이트이며 교향곡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제4악장은 제9번 교향곡의 하이라이트이며 완성이다. 4악장에서는 마침내 지구와 우주, 지상과 천상이 하나가 된다. 인생의 고통과 기쁨, 고난과 환희가 한꺼번에 녹아든다. 첼로에서 바이올린을 거쳐 인간의 음성을 통해 완결되는 거대한 멜로디는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도 마법처럼 매번 새롭게 들린다. 교향곡에 기악과 성악이 합쳐짐으로써 음악에 마침표가 찍힌 듯하다.

베토벤은 동시대 독일 시인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여 성악가들이 합창하게 함으로써 이 교향곡은 사람들에 의해 ‘합창’이라는 부제를 달게 되었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낙원의 딸이여…….”로 이어지는 장엄한 노래는 인류의 영원한 단결과 우애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세계 모든 국가와 민족에게 평화의 상징으로 통한다. 

무엇보다 4악장에 등장하는 합창은 미국의 시인이자 목사였던 헨리 반 다이크가 작사한 가사에 새롭게 덧입혀 찬송가로 불림으로써 크리스천들에게 더없이 친숙한 노래가 되었다.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 같아
죄와 슬픔 사라지고 의심구름 걷히고
변함없는 기쁨의 주 밝은 빛을 주시네

 

1824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제9번 교향곡이 초연되었을 때, 작곡자인 베토벤은 이 위대하고 찬란한 음악을 듣지 못했다. 출타 중이어서가 아니었다. 현장에 있었으나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청력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들을 수 없는 비운의 작곡가. 그렇지만 그는 청력보다 더 예민하고 감각적인 영혼의 귀를 통해 지상과 천상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이 대곡을 감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연주가 끝났을 무렵, 극장 안은 탄성과 감격으로 물결쳤다. 박수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무대 위의 지휘자가 베토벤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거장의 뒷모습을 보며 많은 관객이 눈시울을 적셨다. 이를 보다 못한 한 연주자가 그를 관객들에게 돌려세웠고 비로소 베토벤은 열광하는 청중들에게 화답할 수 있었다. 

어떠한 수식어로도 담아낼 수 없는 음악가 베토벤. 그의 삶은 음악만큼이나 화려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가난했고 불행했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으며, 어머니는 병약했다. 장남인 베토벤은 열다섯 살 때부터 동생들을 위해 피아노 교습으로 돈을 벌어야만 했다. 소년 가장이었던 셈이다.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 외에, 그의 주변 환경에 남들보다 나은 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삶은 힘겨웠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의 무게는 버거웠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1796년과 1800년 사이에 점점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음악가에게 있어 사형 선고와 같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화가가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 어렵듯, 연주를 들을 수 없는 음악가가 좋은 곡을 작곡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시련과 역경, 그의 인생 앞에는 늘 그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_픽셀


어떤 목표를 달성하거나 욕구를 충족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우리는 종종 좌절에 빠진다. ‘좌절(挫折)’이란 마음이나 기운이 확 꺾이는 것이다. 좌절의 원인은 물리적 장애, 사회경제적 요인, 신체적 요인, 심리적 결함 등 다양하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는 공격, 고착, 퇴행, 우울 등이 있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야심 차게 준비한 일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을 때, 우리는 좌절을 경험하고 우울증에 시달린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절망이 있다. ‘절망(絶望)’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정신적 상태를 의미한다. 절망에 빠지면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린 채 정신이 혼미하고 삭막해진다. 19세기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죽음이지만, 이보다 더 두려운 것은 스스로 생의 지고한 목표를 잃는 것이다. 그에게 절망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격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베토벤은 인생에서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고난을 두루 경험했다. 그렇지만 그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고통스럽지만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당당히 마주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가 만약 좌절과 절망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병에 이르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불멸의 음악을 듣는 환희를 모른 채 덤덤하게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매년 연말이면 세계 곳곳에서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이 연주된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소망 속에 맞이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곡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는 하나라는 이 아름다운 사랑과 평화의 선율을 들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꿈과 희망을 품는다. 베토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이 마지막 교향곡의 대미를 사람의 목소리로 완성함으로써 음악을 통한 인류의 구원에까지 다가갔다. 고통의 심연 속에서 예술의 극치가 탄생한 것이다.

 

나는 요즘 사람들이 이 곡을 더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지구촌이 큰 환란에 처해 있는 까닭이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투병으로 신음하고 있으며, 이동이 제한되었고, 경제가 곤두박질쳤으며, 먹고사는 일이 더욱 힘들어졌다. 주변이 온통 절망뿐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좌절할 수도 절망할 수도 없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우리의 관심사는 그 자신이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생활하는 것이다. 베토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삶은 절망이었으나 그의 음악은 희망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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