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림의 <사랑 때문에 아픈가요?> (2)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윤미림 전문의] 

 

얼마 전 소개팅한 사람에게서 애프터가 오지 않는다. 그리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괘씸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사실 전화나 문자가 왔더라도 다시 만나지 않으려 했었다. 학벌, 직업, 외모, 뭐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뭐랄까 끌림 같은 거. 첫눈에 마음을 확 사로잡을 만한 그런 강렬한 느낌 뭐 그런 거. 그런 게 전혀 없었으니까.

지난번에 헤어진 그 사람도 그랬었지. 무난한 상대였지만, 나 없으면 죽고 못 산다는 절박함이 없었어. 만나자면 나오고, 밥 먹고, 차 마시고, 늘 그런 식이었지. 그쪽이 그만 만나자고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할 참이었어. 아깝게 선수를 놓쳤지만 말이야.

나는 왜 이렇게 연애 운이 없는 걸까? 이만하면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데, 왜 하나같이 이상하거나 지질한 사람들만 걸리는 거야?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벌을 받는 거지?

이런 지질한 인간이라는 걸 결혼 전에 알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이지. 그래, 조상신이 도왔다. 미리 잘 거른 거야.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이 찝찝한 이 느낌은 대체 뭘까?

 

사진_픽셀

 

연애가 잘되지 않을 때, 답답한 마음과 초조한 마음이 뒤범벅된다. 

연애 상대가 있는데도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이상형이 이 사람 맞나?’, ‘서둘러 이 사람의 마음을 받아줬다가 나중에 후회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 저런 염려가 꼬리에 꼬리를 물으면서 불안을 달고 산다. 

연애 상대가 없으면 더 좌불안석이다. ‘그냥 지난번 그 사람하고 잘해 볼 걸 그랬나?’, ‘이번에 만나서 또 잘 안 되면 어떡하지?’, ‘이러다 정말 평생 혼자 사는 거 아냐?’ 열애 중인 친구가 부럽다가도 엄마 잔소리를 들으면 아무한테나 청혼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럴 때 빠지기 쉬운 게 자기기만이다. 내 연애가 잘되지 않는 이유, 내가 지금까지 좋은 짝을 만나지 못한 이유, 이만하면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내가 아직 싱글인 이유, 내가 겨우 저 정도 상대방과 결코 결혼할 수 없는 이유, 이 모든 이유를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기에 내가 외롭고 힘든 것이다.

 

자기기만(自己欺瞞, Self Deception)이란 스스로 속인다는 뜻으로, 사실과 다르거나 진실이 아닌 것을 합리화하면서 사실로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현상을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행위이기는 하지만, 심할 경우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생존 본능 차원에서 상대방을 더 잘 속이고 중요한 정보를 내보이지 않기 위해 자기기만이 일어난다고 본다. 약육강식이 횡횡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위협적인 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진실을 드러내지 않고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 이때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고 행동해야 상대방을 더 잘 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기만은 연애 영역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필요한 것이다. 이른바 콩깍지가 씔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실제보다 더 좋고 매력적인 이성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연애가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를 찾다가 자칫 자기기만의 덫에 빠지게 되면, 자기 발전 없이 상대방만을 탓하는 자신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자기기만에서 깨어나는 것은 굉장한 고통일 수 있다. 지옥 불에 던져져 담금질을 당하는 기분일 수 있다. 인정하기 싫었던 자신의 부족함과 결함을 직면해야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욕심과 미숙함을 대면하게 될 수도 있다.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건 결국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가능한 것인데, 자기 성찰과 반성이라는 명분으로 때로는 과도하게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고는 우울의 늪으로 빠져든다. 남 탓을 안 하니 이제 자기 탓을 하게 되는 꼴이다.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기도 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나를 바라보되, 그런 자신을 미워하기보다 관용해 준다면, 우울 대신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트라우마나 심리적 외상 이후에 단지 ‘적응’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계기로 내면의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개인적인 역량과 삶에 대한 만족도가 트라우마를 겪기 전보다 더 향상되는 이런 변화를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트라우마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큰 사건이나 질병 등을 뜻하지만, 이성 관계의 실패도 우리의 삶에 큰 타격을 주는 일종의 작은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는 다음 이성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심리적 외상 후에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또 일부 사람은 성장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물론 큰 상처를 겪은 사람에게 이 일로 인해 생긴 좋은 점에 주목해보라고 섣불리 조언해서도 안 되고, 그것이 생각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본보기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성숙하게 지나간 연애를 정리하고, 더 자신을 사랑하게 된 좋은 예가 있다. 미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인 아리아나 그란데의 ‘Thank you, next’라는 노래다. 
 

One taught me love
한 명은 내게 사랑을 가르쳐주었고

One taught me patience
한 명은 내게 인내심을,

And one taught me pain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내게 아픔을 가르쳐주었어.

Now, I’m so amazing
이제 난 정말 굉장해.

Say I’ve loved and I’ve lost
난 사랑을 하고 잃기도 했지.

But that’s not what I see
하지만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So, look what I got
그러니 내가 얻은 것들을 봐. 

Look what you taught me
네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을 봐.

And for that, I say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하지.

Thank you, next
고마워, 다음 사람.

 

아리아나 그란데는 실제 전 남자 친구 네 명을 언급하면서 연애 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자신을 사랑하며 성숙해진 이야기를 노래한다.

A와는 결혼까지 생각했었고, B는 나에게 천사와도 같았으며, 누구는 내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고, 누구는 인내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누구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제삼자로 지칭하면서 그 사람과 사랑하며, 그 멋진 사람이 자신에게 사랑과 인내와 고통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는 내용이다.

사랑 때문에 잃은 것도 많지만 지금 자신에게 남은 것, 깨달은 것을 바라보면서 지나간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다음 사람을 기약한다는 내용이다. 비록 아픔을 준 사람들이지만 그 아픔을 통해 성장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한 쿨한 고마움인 것이다.

자기기만에 빠져 자신을 지질한 상대에게 그저 당하기만 한 피해자로 여겼다면, 이런 고마운 감정은 들 수 없다. 자신을 피해자가 아닌 행위의 주체로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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