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이야기로 대중들과 공감하면서 위로를 전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권순재

“마음이 부서져 본 적 있나요?”
“잘라내어 버리고 싶은 인생의 순간이 있나요?”
“인간은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요?”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책 속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영화에 관한 책을 썼다 해서 펼쳐보니 곳곳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가볍지 않은 질문들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질문하는 존재인가, 해답하는 존재인가?

 

의사는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문을 열어주는 사람

“영화 <설국 열차>를 보면 끝없이 질주하는 기차 안에 두 개의 세계가 등장합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맨 뒤쪽 칸과 선택된 사람들이 호화롭게 살아가는 맨 앞쪽 칸이죠. 폭동을 일으킨 꼬리 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절대권력자 윌포드가 도사리고 있는 머리 칸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서 굉장히 이질적인 인물이 나타나요. 송강호 씨가 연기한 남궁민수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디로 가라고 알려주지 않아요. 대신 문을 열어주죠.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사도 문을 열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선택 자체를 우리가 해주지는 않아요. 환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정신과 의사가 모든 걸 해결해 줄 수는 없어요. 우리는 신도 아니고, 그렇게 현명하지도 않아요. 선택권은 환자들에게 있죠.” 

장마가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맑고 푸른 하늘이 왠지 어색해 보이던 어느 날, 어김없이 장대비가 퍼붓다가 잠깐 그친 사이,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권순재 전문의를 만났다. 그의 대답이 그랬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란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씨네큐브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만든 흑백 영화 <로마>를 본 적 있다. 멕시코시티 안에 있는 로마 지역을 배경으로 한 중산층 가족의 일상을 그린 영화다. 주인공은 집주인 부부가 아니라 젊은 가정부인 클레오라는 여자였다. 197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가정 내 불화와 사회적인 억압을 생생히 재현한 이 영화를 보며 인생이란 현재를 얼마나 잘 견뎌내는가의 총합이라고 느꼈었다.

“우리의 모든 아픔 중 예상할 수 있고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될까요? 모든 상처 중 이유를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상처가 몇 개나 될까요? …… 당신의 감정이 당신의 내면세계를 벗어나 누군가와 함께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이 세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는 그 순간, 당신은 당신의 모든 생애를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됩니다. 현재를 온통 물들였던 과거에서 비롯된 색들이 벗겨지고 당신은 당신 주변의 감각을 생으로 온전히 느끼게 됩니다. 어두운 배경음악이 사라진 자리에는 삶의 실감과도 같은 현실의 소리가 채워집니다. 당신은 과거의 언덕 위에서 현재를 내려다보는 관조자의 위치에서 내려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현재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진정한 주인공이 됩니다.”

같은 영화를 본 그의 감상이다. 다양한 시각에서 영화를 해석하고 의미를 발견해낸 작가 권순재는 어느새 독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상처를 치유하는 의사 권순재로 돌아와 있었다.

문화예술의 많은 장르 중에 유독 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 그리고 영화를 통해 사람의 내면을 성찰하고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지 물었다.

“영화가 그냥 좋았어요. 인생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중 하나를 고르는 선택은 거의 없어요. 대개 이쪽을 고르면 저쪽에 문제가 생기고,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곤 하죠. 영화를 보며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과 환경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가를 주목하는 게 흥미롭더군요. 의사로서 저는 환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해요. 상담하고 진료한 내용을 발설해서는 안 되죠. 그런데 영화 이야기는 얼마든지 해도 괜찮더라고요. 이를 치료의 도구로 사용하고 글의 소재로 삼으니까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상처를 덜 받고 삶의 주체가 될 것인가?

눈에 보이는 몸을 치료하는 의사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치료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게는 뭔가 남다르거나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독심술이나 심미안 같은.   “의사로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스스로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의사인 자신의 정신세계와 환자의 정신세계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점을 모색하면서 치료 방향을 잡아 나가다 보면 나는 특별한 사람이고 당신은 내 말을 들어야 해, 이렇게 생각할 우려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치료에서 환자가 중심에 있어야 하는데, 의사가 중심에 자리하게 돼요. 스스로 끊임없이 돌아볼 수 있는 능력과 항상 뭘 알게 되더라도 그 너머에는 아직 내가 보지 못한 뭔가가 있을 거라는 사려 깊음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는 현재 진행형이다. 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모르기에 막막함은 피로감을 더한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사람들의 불안과 초조는 임계치에 다다른 듯하다. 이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정신건강을 유지해야 할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거리 두기’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거리 두기가 필요하게 되었죠. 가족이나 회사나 사회 모두가 관계 맺음의 연속인데,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른 거리 두기냐 무척 혼란스러워요. 그러니까 더 스트레스를 받고 힘든 겁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관계를 끊어내다 보면 상처를 받아요. 그래서 쉽게 끝내지 못하는 거죠. 저는 요즘 이에 대해 고민하면서 책을 쓰고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상처를 덜 받고 삶의 주체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에 관해 쉽게 써보려고 합니다.” 

코로나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언택트 시대인 요즘은 어떻게 영화를 봐야 좋을까? 이 시기가 길어지면 영화 산업에 큰 위기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영화는 시공간 예술이지만, 그 속에 영화를 보는 나도 포함된 거잖아요? 예전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는데, 지금은 집에서 편하게 넷플릭스로 영화를 즐기는 거죠. 연인끼리 안락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장점도 있는 거예요. 시대가 변하면서 영화에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는 겁니다. 대형 복합 상영관에서 개봉한 영화만 관객들의 호평을 받는 게 아니라 넷플릭스로만 개봉한 영화도 수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시대가 온 것이죠.” 

 

앞서 언급한 영화 <설국 열차>에서 마지막 맨 앞칸 문 앞에 서서 남궁민수가 말한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이런 문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벽이라고 생각해 온 바깥으로 향하는 이 문 말이야.” 

그가 열고 싶은 문은 계층 상승을 위해 맨 앞쪽 칸으로 가는 문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가 있는 기차 밖 세상으로 향하는 바깥문이었다. 의사 권순재가 열고 싶은 문은 뭘까? 약육강식의 논리가 범람하는 세상 속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해 마음의 방주의 문을 여는 게 아닐까?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그의 책 제목을 보며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승준|『허기진 인생, 맛있는 문학』, 『신의 밥상 인간의 밥상』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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