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6>

[정신의학신문 : 시청역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항상 밝은 표정으로 들어오는 환자가 있었다. 그리고 올 때마다 한 주 동안 살면서 자신에게 좋아진 부분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의사를 흐뭇하게 만들어주는 환자였다. 

그녀는 회사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무드 메이커 역할을 했다. 상사들에게는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직원이었고, 후배들에게는 편하게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 같은 선배였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듬직한 의리파 친구였다.

어떤 모임이든 그녀는 모임장을 맡곤 했다. 모이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회비를 걷어서 비용을 지출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자리였기에 아무도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매사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누구도 나서지 않으면 으레 자신이 앞장서 해결함으로써 문제를 깔끔히 정리해야 직성이 풀렸다. 한마디로 핵인싸 같은 사람이었다. 

 

고민이라곤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녀가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온 건 남자 친구 때문이었다. 남자 친구와의 관계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이었다. 남자 친구를 만나는 건 좋은데, 자신의 마음이 활짝 열리지 않아 답답하다고 했다. 몇 차례 상담 끝에 그녀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은…… 남자 친구가 계속해서 성관계를 요구해요.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거절하면 남자 친구가 싫어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응하곤 하죠. 남자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다니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이런 관계가 이어지다 보니 그 친구 생각만 하면 혼란스러워요.”

고민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그녀로서는 자기로 인해 남자 친구 기분을 망치고, 둘 사이의 관계를 틀어지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 문제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체로 무난했기에 자기만 참고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잘 맞는 부분은 그냥 유지하고, 잘 맞지 않는 부분은 자신이 맞춰주면 되는 거였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건강한 연인 관계일까?

핵인싸 님의 고민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사진_픽셀


상담 치료를 진행한 결과 핵인싸 님 고민의 근원은 아주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어렸을 때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무조건적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 보통의 다른 어머니들은 아무리 환경 조건이 여의치 않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식에게 쏟아붓는 무조건적 사랑을 하기 마련이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이런 사랑을 받으며 새싹이 나무가 되듯 건강하게 자라난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느낌, 이게 바로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핵인싸 님의 어머니는 그렇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바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도 어머니는 집에 있지 않았다. 어쩌다 집에 있는 날에도 피곤하다며 휴식을 취할 때가 많았다. 지쳐 있는 어머니를 붙들고 나랑 놀아달라며 졸라댈 수는 없었다. 어머니를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 안겨야 할 나이에 눈치를 보며 표정부터 살피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닌가 봐. 내가 어떻게 하면 엄마한테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녀는 이런 고민을 하며 자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머니로부터 무조건적 사랑을 받는 아이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특별한 아이가 된 것이다. 오랜 생각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런 거였다. 

‘엄마를 기쁘게 하면 날 사랑해주겠지.’

무조건적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는 조건적 사랑을 선택했다. 뭔가를 해주면 사랑을 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녀만의 사랑 방정식이 확립된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성장했고 어른이 되었다. 그녀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가 잘해야 저 사람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뭐든지 잘하려고 애썼고, 적극적으로 앞장서게 되었으며, 먼저 챙겨주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주변 사람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는 핵인싸가 되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가끔 이상한 일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녀가 별로 잘해준 것도 없는데, 누군가 먼저 그녀에게 잘해주거나 친절을 베풀면 무척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혹시 무슨 저의가 있는 건 아닐까, 나도 받은 만큼 빨리 되돌려줘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무조건적 사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경우는 대략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남자 친구의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아끼는 마음이 클수록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더 잘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끝도 없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남자 친구가 성관계를 요구할 때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에 있어서까지 상대방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녀가 가진 문제의 본질이었다.

 

핵인싸 님의 사랑은 매우 위험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살고 있기에 자신의 조건적 사랑 방정식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의 인기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자신이 조건적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맨 먼저 핵인싸 님의 인간관계를 패턴으로 정리해 보도록 했다. 가족, 회사 직원들, 친구들 그리고 남자 친구에 이르기까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도식화한 것이다. 그걸 한눈에 들여다보니 역시나 자신의 인간관계가 뭔가를 주고받는 패턴이 일정한 규칙성을 갖는 조건적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다음 단계로 감정이입을 통해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깊이 들여다보도록 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보다는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아온 까닭에 자기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것에 행복을 느끼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 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진 것이다.

끝으로 감정 일기를 적어 보도록 했다. 하루 중 자신이 강렬하게 느꼈던 감정,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 상황, 나중에 내 딸이 나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해줄 수 있는 조언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들, 이런 자신만의 솔직한 감정들을 일기 형식으로 노트에 기록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게 좀 더 수월해질 수 있다.

 

치료를 진행하면서 그녀는 고민의 대상이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그 남자 친구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무조건 사랑해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주고받는 게 없더라도 얼마든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진정한 핵인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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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민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나를 지키는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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