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기와 창조성

광기가 섞이지 않은 위대한 천재란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

 

퀭한 눈동자, 헝클어진 머리칼, 어딘가 얼이 빠진 모습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무작정 식당에 들어와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식당 주인은 그를 조롱하고 쫓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곧 반전이 시작됩니다. 잠깐 건반을 눌러본 그의 손에서 '왕벌의 비행 Flight of the Bumblebee'이 쏟아져 나오자 식당 주인의 입은 쩍 벌어집니다. 격정적인 연주.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영화 <샤인>의 한 장면입니다.

<샤인>의 실제 모델, 데이비드 헬프갓 David Helfgott은 조현병을 앓아 30대의 대부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인물입니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사례를 손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예술가 가운데에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굴곡진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 유독 많은듯 느껴집니다.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n은 전형적인 조울병 양상을 보였고, 라흐마니노프 Rachmaninov는 심한 우울증으로 최면과 정신치료를 받았습니다. 알토 색소폰으로 비밥의 시대를 열었던 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 Charlie Parker에게는 심각한 중독 문제가 따라 다녔고, 그 찰리 파커가 천재라고 칭한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 Bud Powell 역시 정신병원을 들락거렸습니다. 락 뮤지션들에서도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창기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 멤버였던 시드 배럿 Syd Barrett은 조현병을 앓은 것으로 추정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 너바나 Nirvana의 프론트맨 커트 코베인 Kurt Cobain은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와 조울병에 동반 이환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광기어린 천재'라는 개념은 역사가 오래된 고정관념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광기를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일컬었습니다. '파이드로스 Phaedrus'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누구라도 기술만이 훌륭한 시인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여 뮤즈 여신의 광기 없이 시의 문전에 온다면, 그와 광기어리지 않은 그의 작품은 ... 광기의 시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정말 위대한 예술과 정신질환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예술가에게 고통을 안긴 정신병리가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하였을까요?

 

이를 밝히기 위한 정신의학자들의 노력은 역학조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낸시 안드레아센 Nancy Andreasen, 아놀드 루드비히 Arnold Ludwig의 연구가 익히 알려진 것들입니다. 이들의 결론은 대동소이했습니다. 창조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그 친족에서 정신질환의 유병률이 높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연구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표본수, 창조성이나 정신질환의 정의를 명확히 하지 않은 점 등 방법론적 측면에서 여러 가지 한계를 드러내었습니다.

게다가 창조성과 정신질환이 공존한다고 해서, 그 둘 사이에 꼭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 세계에서 결핍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정서적 갈증을 상상 속에서 충족하려 하기 마련입니다. 불우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의 창작욕은 어쩌면 그러한 갈증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나타나는 정신병적인 모습은, 창조성과는 별개로, 굴곡진 삶에 영향을 받은 결과물일지도 모릅니다.

 

스웨덴의 정신과의사 시몬 캬가 Simon Kyaga의 보완된 연구가 나오자 일견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 듯 했습니다. 그는 100만 명이 넘는 환자를 추적한 연구를 진행하였고, (조울병을 제외하면) 예술가들이 특별히 정신질환에 더 잘 이환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 한 가지가 발견되는데요. 조현병, 조울병, 신경성 식욕부진, 자폐증을 앓는 환자의 친족들은 창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창조적 사고와 정신증적 사고가 비슷한 기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창조적 사고가 정신 질환 그 자체는 아닐지언정, (때로는 범위가 모호할 수 있지만) 유전적으로나 신경학적으로 간접적인 연관성을 띄고 있을지는 않을까요?

 

IQ가 낮은 사람에게 '잠재적 억제'가 잘 일어나지 않으면, 십중팔구 정신병이 생깁니다. 하지만 IQ가 높은 사람이 그렇다면, 거의 언제나 창의력이 풍부한 천재가 되지요.

                                                       -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1 에피소드9 중에서

 

솔로로서, 그리고 트리오로서 수많은 명반을 녹음한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 Keith Jarrett 은 드라마틱한 연주만큼이나 까다로운 성격으로 유명합니다. 2007년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열린 페스티벌에서 그는 사고(?)를 칩니다.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던 관객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만 것입니다. 기행은 이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2010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관객들의 기침소리에 연주를 여러 차례 중단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첫 내한 공연 때에는 플래시를 터뜨리는 팬을 향해 '저주'를 내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연장에서 연주 이외에는 완전한 침묵을 바라는 그의 요구는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매니저의 해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음악가의 주의를 흩뜨립니다."

 

그림: Keith Jarrett, The K&ouml;ln Concert, Produced by Manfred Eicher

 

창조적인 인물들은 사소한 주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각성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잠재적 억제 latent inhibition'가 잘 되지 않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익숙한 자극이 들어올 때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익숙한 자극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 적당히 여과시켜버리는 기능이 뇌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재적 억제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은 익숙한 자극마저도 매번 새로운 자극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입니다. 결국 자극의 홍수 속에서 살게 되는 셈이지요. 어쩌면 예민한 일부 천재들의 유별난 행동을 '잠재적 억제'가 잘 되지 않는 현상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은 잠재적 억제를 둔화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시에 창조적인 원동력, 높은 목표지향성에도 관여한다고 합니다. 음악에 공감하고, 마약에 중독되거나, 도박을 하는 일 모두 도파민이 관여하는 보상회로의 작용에 기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적당한 도파민의 작용은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를 촉발시키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되면 말더듬이나 욕설증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 Oliver Sacks는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익살꾼 틱 레이'라는 인물을 소개합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욕설 등 투렛 증후군의 증상으로 고통 받는 재즈 드러머였습니다. 다행히도 그의 병세는 도파민 작용을 차단하는 약물, 할돌을 투여하자 호전을 보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약을 먹을 때면 드럼 연주가 밋밋해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자는 주말만은 약물을 쉬도록 처방하여, 적당한 선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타협을 봅니다.

 

결국 창조성에는 비범한 감성이나 동기 뿐 아니라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조율해낼 지적 능력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성적으로 조현병과 같은 질병에 시달려 인격이 황폐해져버린 인물들은 초창기의 창조적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길포드 Guilford J.P.와 같은 심리학자들은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일정 이상의 IQ가 필수적임을 밝혀내었습니다. 자극의 홍수가 밀려오더라도 이를 조절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 내적 능력이 살아 있어야 하겠지요.

 

여러 연구 결과들로 미루어 볼 때, 이른바 '광기'와 유사한 독특한 정신 상태가 창조성에 기여한다는 주장은 사실인 듯합니다. 어쩌면 창조적인 예술가와 예술작품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신 질환에 대한 편견을 허무는데 가장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신 질환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바라보려는 시각 역시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치료받지 않은 정신 질환이 지나친 고통을 초래할 때 창조적인 능력에 끼치는 영향은 득보다 실이 클 것입니다.

 

정신분석가 에른스트 크리스 Ernst Kris는 일찌감치 이를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영감이란 일차 사고과정을 자아가 조율하고 통제하는 상태 속에 있다. 이와 대조적인, 자아가 일차 과정에 압도되어버린 상태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건강한 자아의 통제 하에서 적당한 일탈이 일어날 때 진정으로 창조성이 꽃피는 것이 아닐까요.

 

 

참고문헌

Nancy Andreasen. Creativity and mental illness: prevalence rates in writers and their first-degree relatives.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987 October; Vol. 144, No.10: 1288-1292

Simon Kyaga et al. Creativity and mental disorder: family study of 300 000 people with severe mental disorder. The British Journal of Psychiatry Oct 2011, 199 (5) 373-379

Alice W. Flaherty. Frontotemporal and dopaminergic control of idea generation and creative drive. Journal of Comparative Neurology. 2005 December 5; 493(1): 147–153

Guilford JP et al. The one way relationship between creative potential and IQ. Journal of Creative Behavior 1973; 7: 247–52

Maynard Solomon, Beethoven Essays, Harvard university press

W. 타타르키비츠 저/손효주 역, 타타르키비츠 미학사 1 고대미학, 미술문화

아놀드 루드비히 저/김정휘 역, 천재인가 광인인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문화원

올리버 색스 저/조석현 역,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려원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구 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수료
국립서울병원 (현 국립정신건강센터) 전공의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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