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 마음 가는 대로

[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염지연 전문의] 

 

지난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최고 시청률을 경신한 작품답게 매회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선우와 이태오, 이태오와 여다경, 손제혁과 고예림, 여병규와 엄효정 등 다양한 개성을 가진 부부들의 위태위태한 일면들을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만드는 전개가 일품이었다.

그중 부부가 아닌 한 커플이 유독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박인규와 민현서다. 이들은 결혼하지 않은 연인 사이다. 그렇지만 보통의 연인들과 다르다. 박인규는 민현서의 삶에 빨대를 꽂고 단물을 빨아먹으면서도 틈만 나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한다. 민현서 역시 그의 잔인함과 야만성에 치를 떨지만 한번 광풍이 몰아친 뒤에는 그를 동정하며 다시 그에게로 돌아간다.

 

의사와 환자로 만난 지선우와 민현서는 서로의 필요 때문에 묘한 거래를 하다가 박인규의 폭력을 생생히 목격하게 된다. 치료 차 다시 들른 병원 진료실에서 두 여자는 한 남자를 두고 다음과 같이 치열한 공방을 벌인다. 

“그런 놈하고 얽혀서 한 번뿐인 인생 낭비하고 싶어요?”

“그 사람 인생이 저한테 달려 있으면요? 걔, 나 아니면 받아줄 사람 없어요. 인생 잠깐 꼬여서 화풀이하는 거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에요. 내가 꼭 괜찮은 남자로 만들 거예요.”

“사람 그렇게 쉽게 안 바뀌어요. 그러다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사랑해서 그래요. 내가…….” 

민현서는 박인규를 사랑한다며 흐느꼈지만 두 사람의 결말은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서로 쫓고 쫓기며 숨바꼭질하다가 박인규가 죽음으로써 파국을 맞은 것이다. 이것으로 남자는 생을 마감했고, 여자는 자유를 되찾았다.

 

이들의 사랑도 사랑일까? 두 사람 관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들의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사랑으로 포장된, 아니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집착 성향과 의존 성향의 일탈일 뿐이다.

박인규가 민현서를 인정사정없이 구타하고 협박하고 폭언을 일삼고 스토킹한 건 사랑이 아니라 범죄다. 사랑을 빙자한 범죄, 그것이 데이트폭력이다.
 

사진_픽사베이


데이트폭력은 연인이라는 친밀한 관계의 특성상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재범률도 대단히 높은 편이다. 성적인 폭력, 과도한 통제, 감시, 폭언, 협박, 폭행, 상해, 갈취, 감금, 납치, 살인미수 등이 모두 데이트폭력의 유형들이다. 우리 주변에는 상상외로 데이트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과 만나고 있다면 데이트폭력에 시달리는 것이다.

- 교제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설레지 않고 두렵다.
- 그가 화를 낼까 무서워 반대 의견을 낼 수 없다.
- 자신과 헤어지면 죽어버릴 거라고 대놓고 말한다.
-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한다.
- 화가 나면 주먹을 휘두르거나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진다.
- 수시로 스마트폰을 검사하고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한다. 

지난 2017년 1만 4천1백여 건이었던 우리나라 데이트폭력 신고 건수는 2019년 1만 9천9백여 건으로 40퍼센트 넘게 늘어났다. 보다 못한 경찰에서는 올해 7월부터 두 달 동안을 데이트폭력 근절을 위한 집중 신고 기간으로 지정해 운영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데이트폭력이 일상화된 것이다.

 

데이트폭력 가해자들은 왜 사랑한다면서 연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까?

이들은 흔히 분노조절장애로 알려진 간헐적 폭발성 장애나 반사회적 인격장애와 같은 심각한 정신병리를 드러내는 행동을 할 뿐 아니라, 우울하고 자존감이 낮거나, 삶에 대한 의욕과 열정을 상실한 부적절감으로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는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로 여겨 함부로 대함으로써 데이트폭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랑이 아닌 집착과 폭력을 ‘사랑하니까 이 정도 행동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나를 떠나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상대방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험하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

물론 여성 가해자도 있지만, 남성이 데이트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왜곡된 성 의식이나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성성을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정신분석적으로는 예전에 아버지나 상사처럼 강한 남성성과 권위를 가진 대상으로부터 받았던 자존심의 상처를 보상받으려는 심리로 자신보다 약한 상대방 여성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가 있다. 자신을 공격했던 사람과 같아짐으로써 그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려는 잘못된 시도인 것이다.

 

“자기야,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정말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내가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던 거야. 믿어줘.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이들은 폭력을 행사한 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으나, 후회나 자책을 하며 상대방에게 과한 애정 표현을 하거나 평소보다 더 잘해주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이 자꾸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은 왜 가해자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의존적인 성향이 있거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폭력을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관심이나 애정으로 오해하기 쉽다. 정서적 폭력도 데이트폭력의 일종인데, 자신이 아닌 다른 이성과 만나거나 연락하는 걸 극도로 차단하는 행동을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상대가 폭력을 저지른 후 죄책감으로 잘해주는 모습을 보인다면, 갈등 극복을 통해 관계가 깊어졌다는 심각한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관계를 끝내는 데 대한 두려움이 커서 폭력을 당하고도 무력하게 지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피해자는 점차 우울해져 계속 폭력을 수수방관하는 악순환에 빠지기도 한다. 슬프게도 피해자의 이러한 심리로 인해 폭력이 정당화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데이트폭력을 당하지 않거나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할까?

첫째, 상대방이 맨 처음 폭력을 행사했을 때 대충 넘어가지 말고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이 폭력임을 자각하고 인정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도록 하는 것이다. 각서를 쓰게 하는 것도 좋다.

둘째, 혼자만 고민하지 말고 믿을 만한 주변 사람이나 관계기관에 연락하는 것이 좋다. ‘112’나 여성 긴급 상담 전화 ‘1366’번으로 신고해도 된다.

셋째, 피해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도록 한다. 내가 못나서 그렇지, 내가 빌미를 줘서 그런 거야, 내가 원인을 제공한 거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비난함으로써 상황을 대충 무마하고 넘어가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넷째, 데이트폭력의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 폭력 직후가 아니면 확보하기 어려운 증거를 자세히 기록하고, 대화 녹음이나 문자 등의 자료를 미리 남겨두는 것이 좋다. 신체적 폭력이나 성적 폭력이 발생했다면 반드시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에 피해 사실을 알려 진단서를 끊고 사진을 찍어둬야 한다.

다섯째, 폭력은 습관이다.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당당하게 대응하면서 상대방과의 연인관계를 분명히 끝내야 한다. 데이트폭력을 그냥 용인한 채 결혼한다면 가정폭력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데이트폭력 가해자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피해자는 없다. 폭력은 강화되고 반복된다. 어떤 관계에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듯, 연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데이트폭력의 문제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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