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2014년 5월, 미국 해외학회를 마치고 돌아오던 모 대학병원 내과 교수진 3명이 기내에서 발생한 3명의 응급환자를 무사히 치료하여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한 비행기 안에서 각기 다른 3명의 응급환자가 발생한 것도 매우 드문 일이지만 그 비행기 안에 내과 의사 3명이 탑승하고 있어 적절한 처치가 이루어진 것도 로또 1등 당첨에 버금가는 행운이라 하겠다.

하지만 기내 응급상황에서 이런 미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2007년 국내 모 항공사의 로마발 비행기에 탑승했던 40대 여성이 장염 증세를 보이다 결국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일본인 의사와 한국인 간호사가 기내에서 응급처치를 취했으나 환자는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유가족과 항공사간의 의견차로 분쟁이 발생했고 한때 기내 응급처치에 대해 큰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2015년 오늘, 지금은 어떨까?

 

1. 의사를 주저하게 만드는 현행 법률

응급 의료에 관한 법률에는 제 5조2 (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에 따르면,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에게 응급의료 또는 응급처치를 제공하여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에 대하여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그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 아니하며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은 감면한다.<개정 2011.3.8.,2011.8.4.> 라는 조항이 있다.

얼핏 보면 응급환자에게 선한 의도로 응급처치를 한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이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음을 행위자 스스로가 입증해야 하고, 만약 환자가 사망했을 때에는 민사상의 책임은 그대로 발생하는 것이며 형사책임 또한 면책해주는 것이 아니라 감면해준다는 것이다.

또한 비행기에 타고 있는 의사를 비롯한 의료인은 업무 중이 아니라 단순 승객의 입장이므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6조(응급의료의 거부금지 등)에 의해 기내에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시 도의적인 차원에서 선의를 베풀 수는 있으나 반드시 나서야 하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2. 남의 일에 나서기 꺼려하는 사회적 분위기

미국 항공우주의학협회가 회원 2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비행기 내 응급상황 유경험자인 응답자 850명 중 533명(62%)만이 진료에 응했고, 이에 응하지 않았던 의사들은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었거나, 음주 중이었음 등을 이유로 꼽았으나 무엇보다도 의료사고에 휘말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본인 주변의 동료 의사들의 경우도, 괜히 남에 일에 나서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두렵고 평소 진료를 보던 환경이 아닌 열악한 환경에서 올바른 진료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유 등으로 이런 상황에 소극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3. 책임만 있고 보상은 없다

간혹 기내에서 닥터 콜(Doctor Call)을 받고 환자를 돌본 후 항공사로부터 답례로 감사의 편지나 USB, 시계 등의 기념품을 선물로 받았다는 의사들의 이야기가 종종 있다. 반대로 감사의 인사는커녕, 당시 행위에 대해 책임 소재를 물어 곤혹스러운 일을 겪었다는 사례도 있다.

이에 필자는 국내 2대 항공사의 법무팀과 의료팀에 직접 연락해보았다. 기내 응급환자 발생 시 닥터 콜을 통한 응급 처치 후 문제가 발생하거나 책임 소재 문제 등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의사에 대한 사내 보호 장치나 가이드라인이 있냐는 질문에 ‘추가적인 보호 장치가 없다’, ‘추후 알아보고 대답해주겠다’는 소극적인 답변을 받았다.

선한 의도로 남을 돕는 일에 대가를 바라는 것은 분명 순수한 의도로 볼 수 없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번도 본적 없는 타인을 돕기 위해 3만6천 피트 상공에서 남들 앞에 나서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억울한 송사에 휘말리거나,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 훗날 남을 돕는 일에 머뭇거리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게 되어서는 어찌 선진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4. 체계화된 미국의 항공 의료 시스템

한반도의 50배 크기에 광활한 영토를 가진 미국은 오랜 국내선 항공 운송의 역사를 가진 만큼 기내 응급환자의 처치에 대한 제도와 서비스, 연구가 활발하다.

세계적인 권위의 의학저널인 NEJM(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2013년에 실린 민항기에서 응급상황의 결과(Outcome of Medical Emergencies on Commercial Airline Flight)라는 논문에 따르면 미국 내 5개의 항공사가 2년간 국내선, 국제선을 통틀어 지상의 응급 대응 센터에 보고한 응급상황은 총 11,920 건으로 604편의 비행 당 1건, 100만 명 당 16명의 환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중 7.3% 해당하는 875건이 환자의 안전을 위해 회항을 결정하였고, 병원에 입원한 경우가 901건(8.6%), 사망이 36건(0.3%)을 차지했다.

사실 기내에서 응급상황이 발생할 일은 확률적으로 매우 낮다. 그러나 심장 마비나 심근경색, 뇌경색, 급성 호흡곤란 등 소위 골든타임이 짧은 중증 질환이 기내에서 발생하는 경우, 환자의 입장에선 응급실에서와 같은 적절한 처치를 받기가 매우 어렵고 항공사의 입장에선 비행기를 회항했을 때 발생하는 경제적, 시간적 손실이 막대하므로 낮은 확률이라도 간과할 수 없는 수치이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응급상황에서 현장에서 닥터콜을 받은 의료인과 지상의 숙련된 응급의학과 의사가 전화로 상의 후 기장과 함께 회항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데, 한국의 경우는 대부분 닥터 콜을 받은 의사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5. 의사의 참여를 유도하는 독일의 항공사

독일의 민항사인 루프트한자(Lufthansa)는 항공편에서 의학적 지원이 필요할 경우, 사전에 등록된 의료진이 도움을 주는 ‘Doctor on Board’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의사는 항공사로부터 5000 마일리지를 제공 받고 항공의학에 관련된 책자와 별도의 수화물 관리, 항공권 할인 등의 혜택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회사가 가입한 책임보험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기내에서 의사로서의 법적 지위를 보장받는다.

이로 인해 의사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응급 상황 발생 시 승객은 안정적으로 의사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찾고 항공사는 빠른 대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2014년 기준 한 해 동안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한 승객 숫자가 450만명, 운항한 비행기만 29만 편을 돌파했다.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12시간 이상의 긴 항공기 여행에서 현실적인 제도 개선과 사회 및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다면, 당신이 비행기에서 쓰러졌을 때 주인 없는 닥터콜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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