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란]
- 임상심리전문가
- 네이버 지식iN eXpert 마음상담 전문가

 

마음과 신체의 연계는 1999년 4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런던으로 향하던 브리티쉬 에어웨이 항공기에서 
의도하지 않게 수행된 실험에서 명확하게 나타났다. 
이륙하고 3시간이 지난 뒤에 실수로 틀어준 메시지는 
승객들에게 비행기가 바다로 추락할 것이라고 알려주게 되었다. 
비행기 탑승원이 즉각적으로 그 실수를 확인하고는 
공포에 질린 승객들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지만, 
여러 사람이 의사의 치료를 요구하게 되었다.
(Associated Press, 1999)

코로나19는 감기, 독감과 유사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병원을 찾거나 혹은 진료소를 찾거나 또는 전화를 하고 있다. 분명 그 중엔 확진 환자도 있겠고 자가격리 대상도 있겠으나 그저 불안이 가중된 누군가의 발걸음과 문의도 분명 있을지 모른다. 

즉, 이처럼 쏟아지는 유사 증상을 지닌 이들로 인해 특정 지역은 진정 검사가 필요한 이가 검사조차 못 받고 돌아가기도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곧 비행기가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뉴스의 헤드라인에 적힌 확진 그리고 사망자의 추가되는 숫자. ‘코로나-격리-사망’이라는 공포를 가져다주는 단어들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강한 연결고리. 그 의심은 곧 끝없는 불안을 낳고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 비행기의 잘못 방송된 멘트는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 사태에 대한 과도한 공포 그 자체와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스트레스원이 일시적이거나 도전거리로 지각될 때는 긍정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심각하거나 지속적인 스트레스의 경험은 우리를 해칠 수 있다.


우리는 코로나를 어떻게 지각하고 있나?의 문제이다. 물론 누군가는 사망에 이르고 누군가는 심각한 호흡곤란을 보이며 급속도로 병원을 꽉 채우고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바이러스를 새로이 연구하고 백신을 개발하려는 시도 또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현재 상황을, 꽤 오래 지속될 거라 예상하는 사람과 언제인지 기약할 수 없지만 곧 좋은 해결책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 간에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며 지각하는 스트레스의 크기가 다를 것이다. 어떠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이미 많은 심리학자들이 연구해 온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이자 심리적 건강과 그와 연계된 신체적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큰 요인이기도 하다.


1994년 지진이 발생한 날,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급사를 초래하는 심장마비가 다섯 배로 증가하였다. 특히 진앙 근처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처음 두 시간 동안에 그랬다. 신체적 소진이 원인이었던 경우는 단지 사망의 13%에 불과하였으며, 나머지는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Muller & Verier, 1996)

 

쉘던 코헨과 그의 동료들(1991)의 실험에서 가장 높은 삶의 스트레스 점수를 나타낸 사람들이 
실험실에서 주어진 감기 바이러스에서 가장 취약하였다.
스트레스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 실험참가자의 47%가 바이러스를 코에 제시하였을 때 감기에 걸린 반면에, 스트레스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참가자들의 경우에는 27%만이 감기에 걸렸다.

 

우리의 신체적 건강을 좌우하는 것에는 적잖이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스트레스 수준이 영향을 끼친다는 설명이다. 코끝에 바이러스가 노출되었을 때 바이러스로 인해 몸이 잠식당하는 비율 또한 스트레스가 높을 경우 더 높다 한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새로운 바이러스의 전파력이 어마어마하다하지만 우리를 실제로 병들게 하는 것도, 지탱해주는 것도 우리의 마음가짐이라는 이야기이다. 바이러스 자체의 치명성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아니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몸에 침투하였을 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심리적 요인이 분명 있다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힘 또한 분명 있다는 근거들이다. 

낙관주의자,
'불확실할 때에 나는 일반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기대한다’
라는 진술에 동의하는 사람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 우리의 기본 관점이 낙관적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스스로 문제를 제어할 수 있다는 제어감을 더 많이 느끼고,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한다고 한다. 

근거 없는 낙관론이 아니라,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뉴스를 함께 찾아볼 수 있는 에너지 그리고 그 중에서 현실적인 정도를 파악하고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너비를 지닌, 나는 그런 사람일까?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너무 많은 안타까움을 표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비난과 절망에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불확실한 흔들림 속에서 결국은 이것이 최선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단단함. ‘이 시국’의 진정한 지혜로운 낙관주의자는 바로 그런 자세를 갖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어떤 다른 선택이어도 괜찮다. 가령 어떠한 형태의 ‘사회적 거리두기’이어도 그게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었다면, 혹은 마스크를 사용하고 소독제를 구비하는 생활 속의 변화를 나의 일상에 적당하게 ‘최선의’ 형태로 유지하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의 지금 삶의 모습이 제각기 다를지라도 그 또한 자신의 마음이 편하다면 됐다.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건 ‘그럼에도’ 불안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이다. 

삶의 일상적 사건에서 유머를 찾아내는 데 능숙한 사람들도 득을 본다. 
웃음은 우리를 각성시키고, 근육을 이완시키며, 편안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Robinson, 1983)


1997년에 개봉했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속 배경이었던 전쟁통 속에서 아버지는 잡혀가는 절박함 속에서 아이를 숨기며 말한다. “우승하면 탱크를 주는 게임 중이란다.”

지금 우리에겐 그런 유머가 필요한 지도 모른다. 아무리 주위에서 얼굴을 붉히고 미간을 찌푸려도 그런 상대에게 우스갯소리 던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 그건 굉장한 내공이다.


참고도서 : 마이어스의 심리학, 시그마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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