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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육아의 환상이 부른 죄책감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되기 전에는 완벽하게 일을 잘 해왔고, 다른 사람에게  전혀 폐도 끼치지 않고 잘 살았을 겁니다. 또한 집도 깔끔하게 정돈하고 스스로의 완벽함에 흐뭇함을 느꼈을 것 입니다. 부모가 되기 전에는 말입니다. 약간의 완벽주의 성향을 통해 우리는 더 열심히 살았고, 더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전처럼 완벽하게 살기가 어렵다는 건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를 키우는 세상 중요한 일에 완벽하고 싶은 욕심이 납니다.

 

왜 남들처럼 모유 수유를 못하는 걸까요? 왜 스마트폰이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식당에서는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걸까요? 왜 나는 프랑스 엄마들처럼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건가요? 어째서 삼둥이 아빠처럼 아이를 잘 보지 못하는 걸까요?

 

사진 하주원

 

완벽주의(perfectionism)는 가장 중요한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부적인 사항에 집착하고 완벽한 결과를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체력과 지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완벽주의자의 경우 시간에 비해 할 일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좌절을 자주 겪습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야 말로 완벽을 달성하기 가장 어려운 상황입니다. 직장을 다닌다면 눈치 보기 않는 위치이기도 어렵고, 옛날처럼 시골에서 너도 나도 도와 줄 수 있는 환경도 아닙니다. 스스로도 동생을 업어 키운 경험이 있는 경우도 드뭅니다. 처음 이라는 말입니다. 육아라는 낯선 과제 앞에 부모는 부족한 점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는 일도 완벽하게 해내고 운동뿐만 아니라 영어공부 등 자기계발도 하고 친구들도 챙겼는데 지금은 육아 한가지만 해도 너무나 힘듭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아이 하나 키우기가 힘든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게다가 육아, 그리고 거기에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살림 문제는 모두 다 잘 했을 때 티가 난다기 보다는 못 했을 때의 틈이 더 잘 보이는 일입니다. 조금만 잘 못해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자괴감에 빠집니다. 큰 문제가 없다면 잘 하고 있는 건데도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늘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대합니다. 그런데, 이 죄책감은 참 이상한 녀석입니다.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 때 인정하고 되짚어 보아야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맞는 이야기입니다. 100명 중에 95명이 잘못 했다 하는데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나은 미래가 없겠죠 (정치 얘기 아닙니다). 그런데 반성이 과도해서, 스스로를 비난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면 어떻게 될까요? 등교할 시간이 되었는데 옷을 입혀줘도 팔도 넣지 않고 텔레비전을 더 보고 있는 아이에게 화를 버럭 냈습니다 (제 얘기 아닙니다). 처음부터 밥 먹을 때 텔레비전을 틀어준 것이 잘못이었다 / 내가 좀 더 빨리 일어나서 준비했으면 밥 먹는 것에 초조해서 텔레비전을 켜주지 않았을 테니, 다음부터는 밥을 10분만 빨리 차리자 /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면 감정을 섞어 소리 지르지 말고 단호하게 이야기 하자 / 대략 이런 정도까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을 반복해서 되새김질(rumination)한다면 오히려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서 화내는 것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심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뒤를 너무 많이 곱씹는다고 재발을 예방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적당히 짚어보는 것은 좋지만, 죄책감에 빠져서 허우적댈 필요는 없습니다.

 

완벽주의, 그리고 남과의 비교

‘애들은 알아서 크는 거다’는 말은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방송에서 나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아이를 위해서 돈 쓰는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실제로 2015년 신생아 1인당 육아용품 구입비는 548만원으로, 아주 옛날로 거슬러 갈 것도 없이 5년 전인 2010년에 비해 두 배가 넘습니다. 나는 아이를 잘 못 키우긴 하지만, 우리 아이는 소중하니까, 라며 비싼 것을 입히고 쥐어줌으로써 그런 죄책감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렇게 애써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물질로 채워도, 더 비싸고 좋은 것을 해주는 부모를 보면 갑자기 초라해집니다. 투자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 순간도 짜증이 나고요. 이를테면 유기농 채소로 만든 요리를 안 먹는 아이에게 짜증을 내거나, 비싸게 주고 산 옷에 흙을 묻히며 신나게 논 아이에게 괜히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 속에 더 오랫동안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일까요? 엄마의 짜증일까요?

육아의 목표를 ‘내가 좋은 부모가 되는 것’보다는 ‘우리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크는 것’으로 튜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좋은 부모를 목표로 하는 것이 꼭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무엇이 먼저일까요?

 

사진 하주원

 

그리고 그 조급함과 자기비난을 아이가 닮는다면?

완벽 하려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계속 스스로를 비난하면 우울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전업주부의 일상, 일과 육아 사이 워킹맘의 끊임없는 갈등, 집에 돌아오면 난장판 속에서 찡그리고 있는 자신의 얼굴… 아이를 낳고 꿈꿨던 완벽주의적인 육아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하지만 그런 우울함을 벗어나고자, 또 완벽주의를 채우기 위해 늘 조급한 채로 살아가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아기들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얼굴을 모방합니다. 말을 못하는 아이에게 있어 모방은 관계의 중요한 수단으로, 감정 표현의 습관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우울하고 불안한 엄마의 아기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주의 산만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도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엄마가 아이를 완벽하게 키우려고 아이와 눈 마주칠 시간에 스마트폰으로 육아에 대해 이것 저것 검색하고, 육아와 살림에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집이 좀 더럽다고 화내고 초조해한다면, 그리고 아이가 그 시간들을 오롯이 몸 속에 기억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먼저 행복해야 아기가 행복한 것입니다. 아기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스스로를 희생해서, 불행해진다면, 아이 역시 불행해 질 것입니다. 부모의 여유 없고 빡빡한 가치관을 배울 것입니다. 세상이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도, 아이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방식이 훨씬 순수합니다. 그냥 같이 있어주고 귀 기울여주고 바라 봐주면 좋아합니다.

 

아이는 ‘세상은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흉내를 통해서 관계를 배울 것입니다. 혹시 내 자신을 위한, 그리고 육아를 위한 육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조금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걸 아이가 알고 원망하지는 않으니까요. 스스로를 질책하고 비교하고 조급해하는 내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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